망망대해를 건너온 갈매기들은 허공에 포물선을 그리며 청산도 봄 바다를 즐긴다. 봄 햇살도 파도가 배때기를 뒤집을 때마다 깨금박질을 하며 푸른 바다를 눈부시게 수놓는다. 밀려오는 파도가 해안가에서 소쿠라지는 모습은 영락없이 세 박자의 ‘봄의 왈츠’이다.
▶ 전남 완도군 청산도 범바위 길에서 내려다 본 섬의 절경 ⓒ연합
드라마 ‘봄의 왈츠’ 촬영지이기도 한 청산도는 완도에서 19.2km 떨어진 다도해 최남단 섬이다. 그 옛날 청산도는 완도에서 목포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운항하던 목선이 잠시 거쳐 가는 중간 섬이었지만 지금은 완도항에서 정기노선을 타고 50분이면 당도한다.
청산도는 하늘, 바다, 산이 모두 푸르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빼어난 자태에 고려 때는 ‘선산(仙山)’, ‘선원(仙原)’이라고 불렸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이자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 섬이다.
청산도 면면은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리얄리 얄라셩”이라는 ‘청산별곡’ 가락에 어울리고, 청록파 시인 박두진이 노래한 ‘청산도’ 가락과도 오버랩된다.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 둥둥 산을 넘어,/ 흰 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 슬로 시티로 지정된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전남 완도군 청산도를 찾은 관광객들이 한가롭게 활짝 핀 유채꽃길을 거닐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그런 청산도 산비탈에는 층층이 구들장 논이 있다. 온돌방의 구들장용 돌을 야산에서 가져다가 돌기둥을 세운 그 위에 구들장을 가지런히 깔고, 구들장 사이마다 작은 돌과 진흙으로 채워 물이 새지 않도록 만든 뒤 그 위에 40cm 정도의 흙을 쌓아 물을 가뒀다가 가문 논을 적셨다. 그 시절 과학 원리를 적용한 점도 놀랍고 한 뼘 땅과 한 톨의 쌀이라도 더 얻어내려는 삶의 지혜와 도전정신을 읽는다. 청산도 구들장 논은 국가중요농업유산이자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논두렁 밭두렁 길이 시작되는 언덕배기는 영화 ‘서편제’가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등짐 울러 멘 아버지가 돌담길에 싸인 황톳길을 내려오며 ‘아리랑’을 선창하자 딸이 이에 화답하고 동호는 북채를 두들기면서 서러움의 절창을 연출한다. 그 길이 서편제 길이다. 바닷가로 동그랗게 휘어지며 평화롭게 멈춰 서는 그 길을 이름하여 도락리 해변이라 한다.
청산도는 섬도 삶도 곡선과 느림의 미학을 보여준다. 해마다 슬로 걷기축제와 천혜의 자연과 호흡하려는 여행자들로 넘친다. 그렇게 걸으며 사색하고 사색하며 배우고 사랑하면서, 가족끼리 연인끼리 계모임끼리 웃음이 폭죽처럼 터지는 그런 모습까지도 장관이 되는 섬….
서편제 길 위를 한평생 걸어온 아낙을 만났다. 열아홉 나이에 청산도로 시집와서 8남매를 잘 키워 출가시켰고, 한 생애의 자산으로 논 5마지기, 밭 10마지기가 있다. ‘서편제’ 촬영 무대의 밭주인이기도 하다. 아낙의 연배는 대부분 해녀들이다. 청산도 해역은 그 해녀들의 숨비 소리로 가득하다. 대부분 제주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다. 1970~1980년대 제주 사람들은 김, 미역을 일본에 수출하며 그런대로 윤택한 삶을 살던 완도로 옮겨오는 일을 육지로 진출하고 교육과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로 삼았다.
그런 세월처럼 휘어진 해안선의 물보라는 섬사람들의 짜디짠 삶과 하얀 희망의 기표이다. 짠 내 나는 삶과 천근만근 생채기처럼 푸른 해역에서는 물에 잠긴 바위, 즉 ‘여(?)’가 많다. 그만큼 해산물도 많이 서식한다. 이런 먹이사슬 덕분에 어족이 풍부하다. 청산도가 ‘감성돔의 1번지’, ‘낚시 천국’으로 불리는 이유다.
청산도는 파시로도 유명하다. 지금도 섬의 관문인 도청항에는 위판장이 있다. 싱싱한 활어를 싸게 살 수 있고 맛볼 수도 있다. 도청항에 내리면 여행 테마에 따라 어느 쪽으로 갈까를 정해야 하는데, 어느 길로 들어서든 해안도로를 따라 다시 도청항으로 연결돼 있다.
신흥해수욕장은 신작로 아래 출렁이는 파도 따라 바다 감상 코스로 제격이다. 갯바위 낚시와 썰물 때 조개도 캘 수 있다.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몽돌해변인 진산해수욕장은 해조음이 일품이다. 지리해수욕장은 1.2km 은빛 해변으로 물이 맑고 수심이 완만해 가족 단위 쉼터로 좋으며 낙조 코스로도 그만이다.
바다에는 여전히 꽃샘추위가 똬리를 틀고 있지만 청산도는 해안을 둥글게 감싸 안은 지형 여건으로 햇살 좋은 봄 길을 동행할 수 있다. 만개하는 들꽃, 올망졸망 구성진 섬을 조망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섬 여행 코스로 안성맞춤인 청산도에서 우리네 영혼을 헹궈보자. 그 섬에 다녀오면, 파도 소리가 오래도록 귓전에 쟁쟁할 것이다.
박상건 한국잡지학회장은 <샘이깊은물> 편집부장과 월간 <섬> 발행인을 지냈고 현재 사단법인 ‘섬문화연구소’ 소장이다. 섬과 등대 이야기를 수년간 써왔으며 단행본도 출간했다. 학자이자 여행가, 작가이기도 한 그는 지금도 틈날 때마다 섬으로 여행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