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성당에서 들은 신부님의 강론은 무척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신부는 매주 단상에서 여러 신자들을 대상으로 강론을 한다. 강론을 하다 보면 앞자리가 비어 있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느낀다고 한다. 그런 그들도 가끔은 청중이 되어 다른 이의 강의를 듣기도 한다. 그렇게 신부들이 모여 강의를 듣는 날이었다. 내가 다니는 성당의 신부님도 강의를 들으러 강의실로 들어섰다. 그런데 신부들도 맨 뒷자리부터 앉더라는 것이다. 강의를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 대상이 학생이건 일반인이건 앞쪽 자리가 비어 있고 뒷쪽에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앉아 있으면 기분이 좋을 리 없다. 강의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의 시간 강사로서 그런 경험을 매번 한다.
하지만 뒷자리부터 앉는 심리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거의 생존본능에 가깝다. 인간은 굳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뒷자리가 좋다. 뒷자리의 특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는 보지만 나는 보이지 않는다’라는 욕구를 담은 것이다. 뒷자리에 앉으면 나는 보이지 않지만 나는 모든 사람을 감시할 수 있다. 유일하게 나를 볼 수 있는 강사의 시선으로부터도 멀리 벗어나 있다. 반면에 앞자리는 뒤에서 수많은 사람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는 한 나는 다른 이들을 볼 수 없다. 뒤통수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는 불안감이 들 수 있는 곳이 앞자리다. 이런 자리에 앉으려면 의지가 필요하다. 심신이 강한 신자, 공부를 열심히 하려는 학생들이 그런 의지를 발휘해 앞자리에 앉는다. 물론 뭘 즐기러 가는 공연장이나 경기장은 예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노출시키지 않는 대신 뭐든지 보려는 본능은 인류가 문명화되기 이전 원시시대의 거친 환경을 생각해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른 맹수의 눈에 내가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대신 나는 나를 노리는 맹수나 내가 사냥하려는 짐승은 잘 볼 수 있어야 한다. 인류 최초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동굴이 이를 잘 충족시켜준다. 동굴 뒤로 나를 위협하는 것은 없으며, 나는 동굴 밖을 완벽하게 감시할 수 있다. 현대의 집 역시도 이런 원리에 따라 디자인되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사물들이 이런 본능에 따라 충실하게 디자인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선은 권력이다’라는 말은 시선의 비대칭성을 연구한 미셸 푸코의 유명한 명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보지만 나는 보이지 않는다’는 본능은 위계를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대개 권력자는 등 뒤에 타인의 시선을 남겨두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벽을 등진 자리에 앉는다. 벽을 등진 자리는 자연스럽게 상석이 된다. 강의실에서 맨 뒷자리를 찾듯이 사람들은 카페나 식당에 들어서면 구석 자리를 찾아 벽을 등지고 앉으려고 한다. 하지만 윗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그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 피터르 브뤼헐의 ‘농부의 결혼식’, 1566~1569년. 벽을 등지고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이 가장 높은 사람이다.
의자의 등받이만큼 이를 잘 구현한 디자인은 없을 것이다. 등받이가 없는 스툴은 대개 대칭적으로 생겼고 기댈 수도 없을 뿐더러 등이 노출되어 있다. 마치 강의실의 앞자리에 앉은 상태와 다르지 않다. 등받이가 있는 의자는 비대칭적으로 생겼고, 등을 편안하게 기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등이 막혀 있어서 등 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마치 벽을 등지고 앉은 것과 비슷한 효과를 얻는다. 16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피터르 브뤼헐이 그린 ‘농부의 결혼식’이라는 그림을 보면, 하객들이 모두 등받이가 없는 길다란 스툴에 앉아 있다. 유일하게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한 노인이 보이는데, 그는 신부의 아버지다. 가끔 뉴스나 신문에서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 관련 뉴스가 나오면 대법관 또는 재판관들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때 그들이 앉아 있는 의자는 등받이가 거대하다. 이는 곧 권력의 상징이라는 걸 읽을 수 있다. 올해 초 개봉한 영화 ‘올 더 머니(All the Money in the World)’는 미국의 대재벌 폴 게티를 다룬다. 영화에서 그가 앉아 있는 의자는 등받이가 거대한 바로크 스타일 의자다. 바로크 의자들은 기능적으로 편안한 의자는 아니지만 네모난 모양의 커다란 등받이 때문에 권력자를 대변하기에는 그만이다. 그래서인지 20세기의 재벌들이나 졸부들에게 여전히 인기가 있다. 헌법재판소의 재판관 의자도 이와 닮았다.
▶ 1 영화 ‘올 더 머니’에서 표현된 폴 게티의 모습. 네모난 등받이가 있는 전형적인 바로크 스타일 의자에 앉아 있다. 2 5·16 군사정변을 상징하는 유명한 사진. 선글라스를 쓴 사람이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다.
선글라스도 비슷한 기능을 한다. 사람의 대화란 말소리뿐만 아니라 눈빛도 아주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하지만 선글라스는 그런 눈빛을 상대에게 전달하지 않고 대화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보지만 나는 보이지 않는다’는 시선의 비대칭성을 아주 잘 구현해준다. 5·16 군사정변을 상징하는 유명한 사진이 있다. 박정희 당시 소장과 양 옆에 박종규와 차지철이 서 있는 사진이다. 이 사진에서 중앙에 있는 박정희 소장은 유일하게 선글라스를 쓰고 있음으로써 그가 가장 큰 권력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건물의 맨 꼭대기 집인 펜트하우스, 산을 등지고 강을 내려다본다는 배산임수(背山臨水) 역시 모두 시선의 비대칭적 권력을 충실히 구현한 사례들이다. 반면에 권력이 없는 사람들은 투명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노출시킨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웃어른 앞에서 정면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른 자세라고 배우는데, 그 자세의 본질은 나의 모든 정보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삐딱하게 앉는 것은 선글라스를 쓴 것처럼 나의 정보를 숨기는 것이므로 건방진 자세가 된다. 연말이 되면 월급쟁이들은 자신의 모든 수입과 지출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작업을 한다. 그들의 재정 상태는 유리 지갑에 비유된다. 반면에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수입과 지출은 알 수 없다. ‘나는 보지만 나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인 것이다.
김신은 홍익대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