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재의 지난 글에서 나는 픽토그램의 고마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비상구, 장애인, 화장실의 그림 사인은 급한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길을 안내한다. 지하철에서 급하게 화장실을 찾는 사람에게 간결하고도 분명한 형태의 남성과 여성의 그림은 반갑기 그지없다. 그런데 웃기지 않은가? 왜 화장실 사인은 남성과 여성으로 표현되었을까? 그 이유가 어떻든 사람들은 그 그림 기호와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을 자동으로 연결한다. 언어란 그런 것이다. ‘새’라고 발음하면, 사람들은 자동으로 공중을 날아다니는 날개 달린 짐승을 떠올린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자. 공중을 날아다니는 짐승을 왜 굳이 ‘새’라고 발음해야 하나. 거기에는 필연성이 없다. 따라서 나라마다 그 짐승을 지시하는 발음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를 스위스 언어학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언어의 자의성’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특정 대상을 지시하는 단어의 소리는 모두 자기 멋대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언어가 먼저 있고 그다음 언어에 맞게 만물이 창조된 것이 아닌 이상 이는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니까 전 세계 모든 언어는 그저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임시적인 약속일 뿐이다.
그림 기호 역시 마찬가지다. 남자 여자 모양의 간결한 그림이 화장실을 지시하게 된 것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없다. 물론 어느 정도의 논리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절대적인 건 결코 아니다. 그렇게 임시로 약속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사회적 약속은 그것을 반복적으로 학습함으로써 우리 뇌가 그 둘 사이를 자동으로 연결하도록 만든다. 그런 학습은 우리 삶을 어느 정도 편리하게 만들어준다. 이것은 물론 고마운 일이다.
▶ 2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쿵푸 팬더’에서 주인공 캐릭터인 팬더가 대나무 모자를 쓰고 있다. 이런 대중 영화를 통해 특정 국가의 이미지가 형성된다. 3 중국인 관광객의 추태를 조롱하려고 디자인한 중국인 ‘금지대변’ 픽토그램 ⓒ김신
하지만 어떤 그림 기호가 화장실, 식당, 지하철, 축구, 개 조심 같은 사물이 아니라 특정 나라나 특정 인종, 특정 성을 지칭하는 경우에는 도덕적인 문제와 편견이라는 무지를 발생시킨다. 몇 달 전 스웨덴에 간 중국인 관광객이 호텔에서 무리하게 난동을 피운 사건이 있었다. 이 일로 스웨덴에서 중국인을 조롱하는 픽토그램이 등장했고, 이 픽토그램이 스웨덴 국영방송에 나오면서 전 세계인에게 알려졌다. 이 픽토그램에는 인종주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삼각형의 모자를 쓴 사람이 젓가락이 올려진 그릇을 들고 똥을 싸고 있다. 그 밑에는 ‘금지대변禁止大便’이라고 한자로 써서 이 픽토그램이 중국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 그림 기호에서 서양인의 머릿속에 각인된 중국인에 대한 몇 가지 ‘보편적’ 인식을 알 수 있다. 먼저 젓가락이다. 젓가락은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문화에 속한다. 한국과 일본, 베트남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하려고 삼각형의 대나무 모자를 씌웠다. ‘쿵푸 팬더’ 같은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을 통해 이 모자는 중국적인 것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젓가락과 삼각형의 대나무 모자. 그것은 중국인에 대한 서양인의 보편적인 인식일 수 있다. 똥을 싸는 모습은 어떨까? 이는 몇 년 전 어떤 중국인 관광객이 루브르박물관 앞에서 대변을 본 사건을 풍자한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중국인 관광객의 추태가 보도되면서 공분을 일으키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변 사건은 아주 특별하고 개별적인 사건이다. 그런 특별한 사건을 이렇게 그림 기호로 표현하게 되면, 그것은 보편적인 것이 돼버린다. 픽토그램은 ‘보편성’을 조건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 1 아프리카 픽토그램으로 검색하면 나오는 이미지. 광활한 영토의 아프리카는 북쪽부터 남쪽까지 다양한 기후와 문화를 가졌지만, 대개 원시적인 이미지와 자연환경으로 기억된다. ⓒ김신
물론 이 악의적인 픽토그램이 더 이상 확대되진 않겠지만, 이 사례는 픽토그램이 갖고 있는 환원주의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환원주의는 하나로 축약될 수 없는 다양하고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현상을 압축하고 보편화하고 추상화해서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려는 것을 말한다. 때때로 특정 인종이나 특정 나라에 대한 정보는 이렇게 픽토그램처럼 축약돼서 알려진다. 우리는 미국이나 프랑스 같은 선진국에 대해서는 굉장히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 하지만 콩고나 남아프리카공화국 같은 아프리카 대륙의 나라에 대해서는 어떤가? 대중이 알고 있는 아프리카에 대한 지식은 ‘내셔널 지오그래피’ 같은 채널에서 해주는 동물 다큐멘터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밖에 영화나 잡지, 책, 인터넷 등의 미디어에 등장하는 원시 조각과 마스크, 옷을 벗고 있는 원주민 등으로 기억된다. 그 결과 아프리카를 표현하는 픽토그램이나 아이콘은 기린과 코끼리 같은 동물, 원시 마스크, 원시 부족 의상을 입은 사람으로 제한된다. 이처럼 아프리카 국가들은 개별적으로 인식하기보다 아프리카 대륙으로 보편화해서 인식한다. 서아시아의 무슬림 국가에 대한 인식도 비슷하다. 하지만 위의 이미지들은 아프리카의 일부 모습이거나 과거의 모습일 가능성이 크다. 아메리카 대륙만큼이나 커다란 아프리카는 엄청나게 다양한 역사와 문화를 가졌지만, 이렇게 환원되고 제한된 정보로 알려짐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 세계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낳는다.
미국처럼 그것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대단히 많이 퍼진 나라의 경우에는 비록 픽토그램이 카우보이나 버팔로 같은 미국 문화와 자연의 일부분으로 표현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미국의 전부라고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카우보이는 미국 문화의 극히 일부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의 경우에는 그들을 표현한 픽토그램이나 아이콘은 편견을 낳는다. 한국에 대해 갖는 외국인의 지식도 그럴 수 있다. 마치 스웨덴 사람들이 중국 사람을 공공장소에서 함부로 똥을 싸는 사람으로 인식하듯이 픽토그램은 환원된 지식의 위험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픽토그램뿐만이 아니다. 보도 사진, 광고 이미지, 백과사전의 이미지 등 특정한 대상을 설명하게 되는 모든 이미지는 때때로 개별적인 것을 반복함으로써 그것을 보편화하는 오류를 범한다. 특히 그것이 특정 나라나 민족, 인종, 성에 대해서 그렇게 할 때 인간은 무지와 편견에 빠진다. 우리가 그런 환원주의 이미지, 기호와 언어의 자의성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김신은 홍익대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