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 라이프>
“한 사회의 품격은 죽은 이들을 대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스틸 라이프>의 감독 우베르토 파솔리니의 말이다.
존 메이는 런던의 구청 공무원으로, 고독사한 사람들의 장례를 치러주는 일을 한다. 악취가 난다는 주민 신고를 받고 출동한 공무원들이 고독사한 시신을 수습하면, 존 메이가 고인의 유품을 정리한다. 혹시 가족이나 지인이 있는지 찾아보고, 부고를 알리기 위함이다. 하지만 연락을 받은 지인들 중 장례식에 참석하겠다는 사람은 드물다. 고인과 사이가 틀어졌거나, 오랜 단절로 새삼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존 메이는 고인의 종교나 문화권에 맞는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 애쓴다. 사진이나 유품을 통해 추측한 고인의 삶에 걸맞은 짧은 추도문을 작성해 사제에게 낭독하도록 한다. 화장한 뼛가루는 나무 밑에 뿌리고, 장례가 끝나면 고인의 사진을 사진첩에 넣어 간직한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고인이라 할지라도 자신만은 그를 기억하겠다는 태도다.
존 메이의 일 처리는 느리고 비용이 많이 든다. 새로 온 부장은 어차피 장례식은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인데, 지인들도 오지 않는 장례식을 정성스레 치르는 게 무슨 소용인지 묻는다. 존 메이가 부장의 뜻을 따르지 않자, 급기야 해고된다. 후임자는 인계받은 여러 시신의 뼛가루를 한 구덩이에 쏟아버린다. 이를 본 존 메이는 마지막으로 한 사람의 장례만 자신이 맡겠노라 말한다.
고독사 장례 치러준 공무원의 고독사
그는 존 메이의 이웃이지만 전혀 알지 못했던 빌리 스토크라는 사람이다. 영화는 존 메이가 그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전국을 다니며 고인의 일생을 추적하고 지인을 수소문해나가는 여정을 따라간다. 그의 삶을 알아갈수록 존 메이의 단조로운 삶에 조금씩 변화가 생긴다. 평소에 먹어보지 않던 음식을 먹고 고인의 기행을 흉내 내보기도 한다. 그의 장례를 위해 사비로 고급 관과 장지를 마련한 존 메이는 그를 자신의 친구라고 말한다. 존 메이의 정성에 감동한 빌리 스토크의 딸이 장례식에 참석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장례 후 데이트를 제안한다. 시종 무표정하던 존 메이의 얼굴에 처음으로 기쁨과 설렘이 일렁인다.
영화는 짧은 행복의 순간을 끝으로, 존 메이에게 갑작스러운 죽음을 선사한다. 존 메이의 장례식과 몇 발 떨어진 곳에서 빌리 스토크의 발인이 이루어지고 있다. 존 메이의 노력으로 한자리에 모인 지인들은 초면이지만 서로 슬픔을 다독인다. 빌리 스토크의 딸만이 존 메이의 부재를 의아하게 여길 뿐, 아무도 존 메이의 죽음을 모른다. 수많은 망자에게 유일한 조문객이었던 존 메이건만 정작 자신의 장례식에는 단 한 명의 조문객도 없다는 사실이 고약한 농담처럼 느껴질 즈음, 영화는 마술적인 엔딩을 보여준다. 이 놀랍고도 따스한 광경은 직접 눈으로 확인하시길.
한국의 현실은 어떨까. 1인 가구 수가 급증하고, 노인 자살률과 노인 빈곤율이 1위인 나라이니 고독사도 증가할 테지만 정확한 통계는 없다. 다만 가족 등 연고자가 없어서 행정기관이 장례를 치른 무연고사의 통계를 바탕으로 고독사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고독사는 사망 시점에서 홀로 죽는 것이고, 무연고사는 장례 시점에서 시신을 인도받을 자가 없는 것으로 둘의 개념은 다소 다르다. 가령 고독사한 뒤 떨어져 살던 가족에게 연락이 닿아 시신이 인계되는 경우도 있고, 친구나 이웃의 곁에서 죽었지만 법적인 가족이 시신 인도를 거부하는 바람에 무연고사로 처리되는 경우도 있다. 현행 장사법상 배우자, 자녀, 부모 등의 순으로 장례 결정권을 지니기 때문에 상위 순위의 가족이 장례 비용 등을 이유로 시신 인수를 포기하면 무연고사로 처리된다.
마지막 길, 국가와 사회 최소한의 의무
한 해에 무연고사로 처리된 사망자는 얼마나 될까.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2017년 기준 2010명이다. 전체 사망자 수의 1% 미만이지만, 최근 5년간 급증 추세다. 특히 베이비부머 세대의 무연고 사망자 수가 노인 무연고 사망자 수에 버금간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사망하는 시기가 오면, 무연고 사망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임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무연고사의 장례는 안치실에서 화장장으로 직행하는 식이었다. 공고도 시신을 처리한 뒤 하도록 규정되어 있어, 고인의 지인이 있더라도 부고도 받지 못한 채 뒤늦게 화장 소식을 접하곤 했다. 이것은 장사법 제1조에 명시되어 있듯 ‘보건위생상의 위해를 방지’하기 위한 시신 처리 절차에 불과할 뿐, 고인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진정한 의미의 장례로 보긴 힘들다.
이를 바꾸기 위해 2018년 3월 서울시는 광역지자체 최초로 ‘공영장례 조례’를 제정했다. 5월에는 서울시립승화원 유족대기실 옆에 무연고 사망자 전용 빈소를 마련하고, 시신을 화장하는 동안 장례식을 갖도록 했다. 이러한 서비스는 가족이 있든 없든 세상을 떠날 때는 국가와 사회가 최소한의 장례를 제공하는 ‘공영장례 제도’의 도입이란 점에서 의미 있다.
하지만 전용 빈소는 너무 비좁고, 서울시의 위탁을 받은 의전업체는 엄숙한 장례 의전에만 치중할 뿐 조문객을 모으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스틸 라이프>에서 보았듯, 무연고 사망자라 해도 적극적으로 지인을 찾아 연락하고 부고를 알린다면 생전에 그를 알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존엄한 장례식이 될 수 있다.
‘나눔과나눔’은 2015년부터 기계적으로 처리되던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에 개입해, 장례식을 주관해온 민간단체다. 공영장례 조례가 시행된 이후에도 ‘나눔과나눔’은 연고자를 찾고, 부고를 온라인으로 알리고, 종교의례 봉사자나 시민 조문객을 모아 ‘애도와 기억’이라는 장례식 본연의 의미를 채우는 역할을 계속 수행 중이다. 가족이든 아니든 고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애도의 주체가 되고, 무연고 사망자에 대해 국가와 시민사회가 책임을 다하는 ‘사회적 애도’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황진미_영화평론가, 대중문화 평론가. 진단검사의학과 전문의로 재직 중이고, 보건정책학 박사과정을 이수했다. 2002년에 <씨네21>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등단한 후 <한겨레> <창비 어린이> 등 많은 매체에 영화와 대중문화 관련 글을 기고해왔다. 텍스트의 사회적인 의미에 주목하고 여성, 장애, 노동, 아동, 외국인, 성소수자 등 소수자 문제에 특히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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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