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 때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거나 이성 친구가 없는 사람도 견디게 해준 분들이 계십니다. 성룡과 해리슨 포드 같은 명배우죠. 성룡의 ‘폴리스 스토리’ 시리즈와 해리슨 포드의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는 명절을 명절답게 만들어준 고마운 영화입니다.
‘인디아나 존스’에서 해리슨 포드는 애리조나대학의 고고학자(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도굴꾼에 가까운) 헨리 월튼 존스 2세 교수 역할을 맡았습니다. 인디아나는 교수의 별명이죠. 인디아나 존스의 실제 모델은 미국인 탐험가 로이 채프먼 앤드루스(Roy Chapman Andrews,1884~1960)입니다. 그는 고래, 상어, 늑대 그리고 몽골 도적떼와 중국 병사에게 습격을 당하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는데, 그의 에피소드가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고학자가 아니라 자연학자였습니다. 실제로 1923년 몽골 고비사막에서 세계 최초로 공룡 알 화석을 발굴했죠. 이것이 바로 전 세계 자연사박물관이라면 어디에나 모형으로 전시되고 있는 오비랍토르의 알입니다. 덕분에 그는 <타임>지의 표지 모델이 되기도 했죠. 그는 미국 자연사박물관의 바닥을 청소하고 표본을 정리하는 일로 시작했지만 1934년에는 미국 자연사박물관 관장에 취임합니다. 그는 가장 성공한 자연학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로이 채프먼 앤드루스는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깊습니다. 그의 동상이 울산 장생포에 세워져 있을 정도죠. 도대체 왜 우리나라에 그의 동상이 있을까요? 앤드루스는 1911년 우리나라에 왔습니다.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귀신고래(Devil Fish)가 바로 앤드루스가 1912년 울산에서 채집한 표본입니다.
귀신고래는 보통 회색고래(Gray Whale)로 불립니다. 전체적으로 회색빛을 띠거든요. 그런데 왜 귀신고래라고 부를까요? 해안에서 머리를 세우고 있다가 감쪽같이 사라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 설명이 많습니다. 귀신고래는 바다 바닥에 사는 무척추동물을 주로 먹으니까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인지 귀신고래는 온몸에 따개비와 바다벼룩을 붙이고 삽니다. 그래서 더 귀신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앤드루스는 다르게 설명합니다. 귀신고래는 포경선이 나타나면 새끼를 구하기 위해 배를 파괴하고 고래잡이를 죽이기도 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는 것이지요. 두 설명 모두 그럴싸합니다. 하지만 귀신고래의 우리말 이름은 쇠고래입니다. 귀신고래나 회색고래는 나중에야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름이죠.
‘인디아나 존스’, 그러니까 로이 채프먼 앤드루스가 우리나라에 온 이유는 귀신고래를 연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9세기 말까지 캘리포니아에는 귀신고래가 잔뜩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10년경이 되니 캘리포니아 인근에서는 귀신고래를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기름을 얻기 위해 하도 잡아서 멸종하기에 이른 것이지요. 그때 앤드루스는 한국에 귀신고래가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에서 거의 멸종된 귀신고래가 정말로 한국에는 있는지 확인하러 온 것이죠.
그런데 정작 현재는 정반대의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북아메리카의 태평양 해안에는 귀신고래가 무려 1만 8000마리 이상 살고 있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에서는 1966년 이후 거의 발견되고 있지 않습니다. 국립수산과학원은 귀신고래에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사진으로 찍으면 500만 원, 그물이나 좌초한 개체를 신고하면 1000만 원을 주겠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 많던 귀신고래가 왜 사라졌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누군가가 잡아먹었기 때문입니다. 귀신고래는 큰 고래입니다. 길이가 15미터, 몸무게 36톤까지 자라지요. 이렇게 커다란 고래를 도대체 누가 잡아먹을 수 있을까요? 귀신고래의 천적은 범고래입니다. 영화 ‘프리 윌리’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고래입니다. 범고래는 ‘이빨 고래’로 영어로는 ‘Killer Whale’이라고 할 정도로 사나운 포식동물이죠. 그런데 과연 범고래 때문에 귀신고래가 사려졌을까요? 지구에는 범고래보다 더 무서운 포식자가 있습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다 잡아먹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인근에는 귀신고래가 없습니다.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서 죽습니다. 고래는 늙어서 죽습니다. 더 이상 먹이를 찾아다니고 숨을 쉬러 떠오를 힘이 없어지면 죽는 거죠. 어차피 죽을 고래라면 우리가 먹으면 안 될까요? 안 됩니다. 더 쓸모가 많거든요. 고래는 바다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다 생태계가 유지됩니다. 바다는 넓은 데다가 아주 깊습니다. 얕은 바다와 달리 깊은 바다는 아주 황량합니다. 먹을 게 없는 곳입니다. 당연히 생태계가 연결되기 어렵죠. 고래 사체는 황량한 바다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입니다.
깊은 바다에 가라앉은 고래 사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데 100년 정도가 걸립니다. 처음에는 심해상어, 먹장어, 게가 몰려와 살을 발라 먹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동물과 미생물이 와서 뼈와 찌꺼기를 먹죠. 깊은 바다에 마치 섬처럼 군데군데 놓인 고래 사체는 심해 생물에게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이면서 바다 생태계를 연결하는 징검다리입니다.
살아 있는 고래는 더 큰 역할을 합니다. 지구에서 이산화탄소를 가장 많이 소비하고 산소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생물은 바다에 살고 있는 식물성 플랑크톤입니다. 그런데 바닷 속의 식물성 플랑크톤이 자라기 위해서는 철 성분이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바닷물에는 철이 부족해요. 플랑크톤을 살려주는 게 바로 고래입니다. 고래는 온 지구 바다를 누비면서 똥을 누거든요. 고래 똥에는 철 성분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고래 똥이 있는 곳에서는 식물성 플랑크톤이 잘 자랍니다. 식물성 플랑크톤은 광합성을 합니다. 이산화탄소를 이용해서 양분을 만들고 산소를 배출하지요. 양분은 동물성 플랑크톤과 어류를 통해서 우리 사람까지 전달됩니다.
고래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일본이나 노르웨이에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불법 포획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고래가 줄어들면 고래 똥도 줄어듭니다. 식물성 플랑크톤이 줄어들고 지구온난화는 가속화되겠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래 고기가 아니라 지구 기후를 지켜주는 고래 똥입니다.
필자 이정모는 서울시립과학관 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생화학을 전공하고 대학 교수를 거쳐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을 지냈다. <250만분의 1>,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내 방에서 콩나물 농사짓기> 등 읽기 편하고 재미있는 과학도서와 에세이 등 60여 권의 저서를 냈고 인기 강연자이자 칼럼니스트로도 맹활약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