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4년을 보낸 우리 학교의 문과대는 건물 모양이 ‘디귿(ㄷ)’ 자 형태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중정원’이라 불리며 학생들의 휴식터 노릇을 하는 공간이었다. 중정원에는 양쪽으로 나무 벤치가 죽 놓여 있었는데, 그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아침 햇살 가득한 파란 하늘을 바라보는 일은 학창 시절 내가 누렸던 커다란 행복 중 하나였다. 그곳의 단풍이 빨갛게 물들고 낙엽이 거리를 뒹굴기 시작할 무렵이면 왠지 모를 쓸쓸함과 함께 뭔가 설레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기대가 가슴을 채웠다. 저 높은 곳으로 풍덩 빠져들 것만 같은 깊은 하늘이 펼쳐지고 이제 막 서늘함이 실린 시원한 푸른 바람이 얼굴을 핥을 때의 기분이란 말로 다 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여름 기운이 완전히 빠져나가고 완연한 가을 에너지가 대기의 향기를 바꿔놓은 10월의 어느 화창한 날, 모처럼 일찍 집을 나와 강의실에 가방을 놓고 중정원으로 나온 나는 오랜만에 맞는 그 기쁨을 누리기 위해 벤치에 앉아 담배를 빼어 물었다. 더할 수 없이 맑은 하늘과 상큼하게 반짝이는 햇살이 생기 넘치는 캠퍼스에 가득 내려앉았고, 벚나무와 꽃사과, 단풍나무마다 무성한 잎새들은 잔뜩 미소를 머금은 것만 같았다. ‘Singing The Dolphin Through’. 크리스 톰슨의 느른한 목소리보다 오히려 고음의 여성 코러스가 더욱 생생하게 감성을 자극하는 맨프레드 맨스 어스 밴드의 노래가 워크맨 이어폰에서 흘러나온다. 국내에 발매가 되지 않아 빽판(불법으로 복제해 저렴한 가격에 팔았던 LP)에서 녹음한 거라 지글거리는 잡음과 툭툭 튀는 소리가 어김없이 함께 묻어나지만 그런 것쯤은 구름 위에 오른 듯한 이 기분 좋은 상태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킹 크림슨의 ‘In The Wake Of Poseidon’을 채우는 풍성한 멜로트론의 향기도, 뉴 트롤스의 ‘Cadenza-Andante Con Moto’에서 펼쳐지는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바이올린도, 스콜피언스의 ‘Fly To The Rainbow’를 이끄는 클래시컬한 기타 프레이즈도, 존 앤 반젤리스의 ‘Polonaise’에 실리는 영롱한 건반과 목소리도 모두 귀에, 가슴에 착착 달라붙는다.
멋진 음악에 한껏 몰입되어 있다 또다시 커피를 뽑으러 자판기 앞으로 갔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일찍 나오셨네요.”
“어, 안녕. 커피 한잔할래?”
귀엽게 생긴 신입생 여자애가 아는 체를 한다. 커다랗고 까만, 그리고 유독 반짝이던 눈망울. 입대 이후로는 본 적이 없어 지금은 자그마한 키의 앳된 모습과 유독 또랑또랑했던 눈동자만이 기억에 남아 있는 그 아이와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눈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뭐 듣고 계셨어요?”
“그냥 좋아하는 음악이야.”
“하하, 무슨 음악이냐고요.”
“들어봐라.”
이어폰을 건네주고 워크맨의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그녀는 맞은편 강의실 창 쪽에 시선을 주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음악을 듣는다. 내가 커피를 몇 모금 더 마실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음악에 빠져 있던 그 아이는 얼마 후 한쪽 이어폰을 빼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음악이 왜 이래요? 너무 무섭다 ….”
“그래? 뭐가 나오는데?”
핑크 플로이드의 ‘Set The Controls For The Heart Of The Sun’이 오른쪽 귀를 타고 전해져 온다. 무서울 만도 하다.
“몇 번 들으면 이거보다 더한 것도 안 무서워. 오히려 미치도록 좋아질 수도 있다. 안 무서운 거 들려줄게.”
빨리 감기 버튼으로 음악을 찾고는 다시 그녀에게 건네줬다.
“….”
“좋지? 많이 들어봤을걸.”
“예, 저 이거 알아요. 이게 누구더라 ….”
크리스 디 버그의 ‘The Girl With April In Her Eyes’가 담긴 1979년 앨범 ‘Crusader’는 당시 내가 무척 아끼는 음반 중 하나였다.
“근데 선배님, 이거 아세요? 이 사람 어두운 걸 싫어한대요.”
‘아아, 어둔 건 싫어(Hi, hi, on and on she rides)’… 198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개그맨 박세민이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이 노래를 가지고 이렇게 웃겼던 적이 있다. 난 전공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학 생활 1년 더 했다고 선배 행세를 한답시고,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끄집어내고 읽은 책 얘기도 하고 음악 얘기도 하며 두 시간짜리 수업이 다 끝나도록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우루루 몰려나오는 동기 여자애들이 야유를 보낸다.
▶ 아일랜드 뮤지션 크리스 디 버그. 독일 트리어에서 열린 유럽투어 ‘라이브 인 콘서트 2013’ 공연 모습 ⓒ연합
“야아… 잘나가는데. 후배 하나 꼬셨냐?”
“야, 교수님이 너 어디 갔냐고 묻길래 중정원에서 열심히 데이트한다고 했다. 이제 과 커플 탄생하는 거니?”
그런 모양들이 재미있는지 쿡쿡대고 웃는 그 아이의 모습이 참으로 해맑았다. 이후 그녀와 따로 만남을 가진 적은 없지만 한동안 그 뻔한 소문이 돌기도 했다. 누가 누굴 좋아한다나 어쩐다나… 며칠 후, 싱그러운 가을 햇살 아래서 들려주었던 그 음악이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건네줬을 때 그녀는 함박미소를 지으며 기쁨을 한껏 드러냈다.
아일랜드의 싱어송라이터 크리스 디 버그의 음악에는 위대한 뮤지션들 못지않은 매력이 담겨 있다. 약간 허스키하지만 달콤하고 로맨틱한 특유의 음색이 그의 정체성을 뚜렷이 드러내주는데, 그는 여느 팝 음악에 결여된 독특하고 풍성하고 아름다운 정서와 분위기를 펼쳐 보였다. 그의 여러 작품에서 보이는 흥미로운 점은 앨범마다 낯익은 이름들이 눈에 띈다는 사실이다. 첫 앨범 ‘Far Beyond These Castle Walls’(1974)의 크레디트에서 라이자 스트라이크와 매들린 벨이라는 이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이유는 이들이 핑크 플로이드의 명반 ‘The Dark Side Of The Moon’(1973)이나 이탈리아 그룹 우노의 셀프 타이틀 앨범(1974), 로저 글로버 프로젝트의 록 오페라 ‘Butterfly Ball’(1974), 그리고 로저 워터스의 ‘The Pros And Cons Of Hitch Hiking’(1984) 등에서 목소리를 들려줬기 때문이다.
두 번째 앨범 ‘Spanish Train And Other Stories’(1975)에서는 제너시스의 ‘Nursery Cryme’(1971)에 참여했던 데이비드 헨첼이 편곡을 담당했다. 세 번째 앨범과 네 번째 앨범은 참 화려하다. ‘At The End Of A Perfect Day’(1977)는 야드버즈의 베이시스트였던, 이후 캣 스티븐스, 일루전 등의 앨범을 프로듀스 했던 폴 샘웰 스미스의 프로듀스와 그린슬레이드 등 수많은 밴드의 앨범에 참여한 브리티시 록계의 장인(匠人) 마이크 보박의 엔지니어로 완성됐다. ‘Crusader’에는 이안 베언슨, 데이비드 페이튼, 스튜어트 엘리엇, 그리고 앤드루 파월 등 아예 앨런 파슨스 프로젝트의 단골 멤버들이 고스란히 참여해 연주를 들려준다. 물론 어떤 ‘브랜드’가 음악적 가치의 잣대가 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이름들이 포함돼 있는 작품들의 평균적인 완성도를 생각해보면 이름만으로 가슴이 뛰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정말로 크리스 디 버그의 모든 작품은 ‘수준 이상’이다.
기본적으로 그의 음악에는 중세의 귀족적인 분위기가 짙게 깔려 있다. 활동 초기 소프트 록과 아트 록 스타일의 사운드에서 1980년대의 뉴웨이브와 팝적인 성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을 행해왔지만, 다른 어느 음악과도 구별되는 우아하고 세련된 사운드와 목소리는 늘 그 이름과 함께한다. 특히 ‘Crusader’는 우리나라에서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고 사랑받은 앨범이다. 눈동자가 맑았던 그 아이를 떠올리게 하는(물론 아름답고 슬픈 가사 내용과는 무관하다), 언제 들어도 신비로운 하프 연주와 아름다운 선율이 가슴에 휘감겨오는 명곡 ‘The Girl With April In Her Eyes’와 잔잔한 피아노 전주로 시작해 격정적인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Carry On’, 그리고 웅장한 ‘Just In Time’, 서사적인 대곡 ‘Crusader’ 등 모든 수록곡이 각기 찬란한 색채를 드러내는, 크리스 디 버그 최고의 작품이다. 얼마 전 정말 오랜만에 이 앨범을 들어보았다. 문득 “선배님, 안녕하세요?” 하는 밝은 목소리가 음악에 실려 들리는 듯했고 공연히 가슴이 벅차올랐다. 추억이란, 특히 좋은 시절의 추억이란 항상 몇 십, 몇 백 배는 더 아름답게만 느껴지는 법이니까.
김경진 | 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