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의 대장정을 마치고 달콤한 휴식을 즐기고 있는 남녀 프로배구는 꿈같은 한 시즌을 보냈다. 새로운 타이틀 스폰서를 맞아들여 야심차게 시작했고, 새로운 챔피언을 주인공으로 세우며 막을 내렸다. 여자부에선 한국도로공사가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 통합 우승으로 창단 48년 만에 정상에 올랐고, 남자부에선 정규리그 3위 대한항공이 1위 팀 현대캐피탈을 3-1로 꺾는 파란을 일으키며 다섯 번째 챔프전 도전 만에 처음으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명승부와 기록 잔치 속에 배구 인기도 치솟았다. 여자배구 포스트시즌 전 경기의 케이블TV 시청률은 평균 1.02%를 기록했고, 챔피언결정 2차전은 2.8%로 같은 시간대 프로야구 시청률(0.47~1.37%)을 훌쩍 뛰어넘었다. 특히 여자배구 포스트시즌 평균 관중 수는 3579명으로 12년 만에 V리그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배구 여제’ 김연경이 활약했던 2005~2006시즌(3328명)보다 많았다. 몰락하는 농구 인기와 대비돼 배구계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시즌이었다.
남녀부 모두 드라마틱하게 우승팀을 배출했다. 한국도로공사는 6년 연속 챔피언결정전에 오른 ‘봄 배구’ 단골손님 IBK기업은행을 시리즈 전적 3전 전승으로 따돌리고 통합우승과 함께 2005년 프로 출범 후 14시즌 만에 처음으로 우승컵에 입맞춤했다. 대한항공은 ‘디펜딩챔피언’ 현대캐피탈을 시리즈 전적 3승 1패로 따돌리고 역시 프로 무대에서 첫 정상에 섰다.
용병 의존도 낮아진 예측 불허의 승부
도로공사는 4수, 대한항공은 5수 만에 누린 감격적인 챔피언결정전 우승이었다. 지난 시즌 챔피언인 현대캐피탈과 IBK기업은행이 나란히 챔피언결정전에서 신흥 강자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지난여름 활발한 선수 이적으로 이번 시즌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진 전력 평준화에 따른 결과다. 남자부 7개 팀 중 챔프전에서 축배를 든 팀은 삼성화재(8회), 현대캐피탈(3회), OK저축은행(2회), 대한항공 등 4개 팀으로 늘었다. 여자부에선 도로공사를 마지막으로 모든 팀이 우승을 경험하게 됐다.
인기 폭발의 원동력 중 하나는 외국인 선수 의존 일변도의 ‘몰빵 배구’에서 탈피했다는 점이다. 이번엔 ‘특급 외국인 선수 보유=팀 성적’ 공식이 성립되지 않았다. 우리카드의 크리스티안 파다르는 개인 득점 1위(966점), 서브 득점 2위(세트당 0.69), 공격성공률 4위(53.62%), 블로킹 10위(세트당 0.4) 등 공수에 걸쳐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파다르의 공격점유율은 게임당 50%를 넘는 경우가 많았고 최고 57.3%에 달하기도 했다. 우리카드가 ‘파다르 원맨팀’으로 불린 이유다. 하지만 최고의 파다르가 있는 우리카드는 정규리그에서 7개 팀 가운데 6위에 그쳤다. 우리카드의 성적은 파다르의 컨디션에 따라 좌지우지됐고 5세트 접전이 벌어지면 파다르의 체력이 떨어져 경기를 그르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여자부 KGC인삼공사 역시 외인 알레나가 득점 1위(864점), 공격성공률 4위, 블로킹 3위로 활약했지만 6개 팀 중 5위에 그쳤다. ‘몰빵 배구’의 한계는 챔프전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IBK기업은행은 챔프전에서 올 시즌 최고의 여자 외인 선수로 꼽히는 메디슨 리쉘(등록명 메디)에게 50%에 육박하는 공격권을 몰아줬지만, 결국 도로공사에 시리즈 전적 0-3으로 완패했다.
▶ 지난 3월 30일 인천계양체육관에서 열린 남자프로배구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을 달성한 대한항공 선수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연합
최장 경기시간·최다 득점 등 풍성한 기록 잔치
올 시즌 V리그는 풍성한 기록이 쏟아졌다. 황연주(현대건설)는 남녀 통틀어 프로배구 최초로 통산 5000득점을 돌파(5257점)했고, 남자부에서는 토종 에이스 박철우(삼성화재)가 통산 4500점 고지를 밟았다. 박철우는 올 시즌 국내 남자 선수 중에서 가장 많은 586득점을 몰아치며 통산 4679득점으로 황연주에 이어 남녀 전체 누적 득점 2위를 달리고 있다. 박철우를 앞세운 삼성화재는 올 시즌 프로배구 1호 팀 4만 득점을 달성했다. 양효진(현대건설)은 지난 2월 6일 프로배구 첫 1000블로킹 달성의 주인공이 됐고, 뒤이어 이선규(KB손해보험)가 같은 달 11일 1000블로킹을 넘겼다. 최고 공격수의 훈장인 ‘트리플크라운(한 선수가 한 경기에서 서브, 블로킹, 백어택을 각 3점 이상 올리는 것)’도 쏟아졌다. 남자부에서는 총 21회, 여자부에서는 2회 트리플크라운이 나왔다. 대한항공을 챔피언에 올려놓은 외국인 선수 밋차 가스파리니(등록명 가스파리니)는 정규리그 5번, 플레이오프 1번, 챔피언결정전 1번 등 총 7차례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했다. 정규리그에서는 파다르가 6차례로 가장 많았다. 진기록도 나왔다. 지난해 11월 2일 수원체육관에서는 한국전력과 대한항공의 혈투가 벌어져 한 경기 최장 경기시간(158분) 기록을 세웠고, 지난 2월 16일 충무체육관(삼성화재-현대캐피탈)에서는 한 경기 최다 득점 신기록(121점+129점=250점)이 작성됐다.
SK, 18년 만의 한풀이
▶ 4월 18일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2017-2018 정관장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SK 김선형이 우승컵을 들어 올리고 있다. ⓒ연합
남자 프로농구도 18년 만에 한풀이에 성공한 서울 SK의 우승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번 시즌 정규리그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SK는 원주 DB와 챔프전에서 1, 2차전을 먼저 내줬지만 역대 최초로 2연패 후 4연승으로 시리즈를 뒤집는 기적을 연출했다. 지난 2000년 이후 18년 만의 우승이며 문경은 감독은 지도자 데뷔 후 첫 정상의 감격을 누렸다.
지난 시즌 7위에 그치며 일찍 시즌을 접었던 SK는 올 시즌 애런 헤인즈를 재영입하면서 도약의 기틀을 마련했다. 주전 가드 김선형이 부상으로 단 9경기 출전에 그쳤지만 헤인즈와 함께 최준용, 김민수, 테리코 화이트가 빼어난 공격력을 자랑했다.
비록 통합우승은 놓쳤지만 DB의 정규리그 우승은 올 시즌 더 큰 화제를 낳았다. DB는 시즌 전만 해도 최하위권 후보로 꼽혔지만 이상범 신임 감독의 리더십을 바탕으로 똘똘 뭉치면서 반전을 일궈냈다. 단신 외인 디온테 버튼이 내·외곽을 넘나들며 맹활약했고, 5년 차 가드 두경민도 일취월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김주성의 역할도 컸다.
지난 시즌 1위에서 최하위로 급전직하했던 KCC는 다시 정규리그 3위로 반등했다. 비록 4강 플레이오프에서 SK의 벽을 넘진 못했지만 안드레 에밋, 하승진, 전태풍 등 주전들이 부상에서 돌아왔고 이정현, 찰스 로드 등을 새롭게 영입하면서 반격에 성공했다.
현주엽 신임 감독을 영입하며 야심차게 출발했던 창원 LG는 17승37패로 9위에 그쳤고, 부산 KT는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10승44패(0.167)로 마쳤는데, 이는 프로농구 역사상 세 번째로 낮은 승률이다.
남녀 농구·배구를 통틀어 이변이 없던 종목은 아산 우리은행의 통합 6연패로 끝난 여자 프로농구다. 그러나 프로농구는 나날이 추락하는 인기에 위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특히 여자 프로농구 구리 KDB생명은 구단 해체를 결정해 충격을 줬고, 남자 프로농구에선 시즌 종료 후 외국인 선수들의 신장 제한 규정으로 도마 위에 올랐다.
성환희│한국일보 스포츠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