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일상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흉기 난동자를 맨손으로 제압할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두렵고 무서운 일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상황에서 흉기를 휘두르며 시민들을 위협하고 난동을 부린 정신 이상자를 잡아 경찰에 인계한 용감한 시민들(변재성, 송현명, 이동철, 오주희, 조경환)이 있다. 이들은 난동자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손이나 목 등을 다치기도 했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면서 자랑할 일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흉기 난동자를 길거리에서 제압한 시민 오주희, 변재성, 송현명(왼쪽부터) 씨는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사건이 발생한 때는 지난 6월 27일,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평온한 저녁이었다. 변재성(27), 송현명(31), 이동철(30), 오주희(30) 씨는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근무하는 동료 선후배 사이다. 이들은 오랜만에 모여 저녁 식사를 한 뒤 지하철 2호선 교대역에서 지하철을 타려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그때였다. "다 죽여버리겠어!"라고 소리를 지르며 한 괴한이 칼을 들고 시민들 사이를 걸어오고 있었다. 괴한은 매우 흥분한 상태였고 눈은 초점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칼로 시민 위협하는 괴한 맨손으로 제압
일행 모두 목과 손, 팔 등에 상처 입어
그러더니 변 씨 일행 쪽으로 갑자기 달려들었다. 변 씨 옆에 있던 오 씨가 괴한의 칼에 목덜미를 긁혀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변 씨는 깜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휘두르며 괴한의 앞을 가로막았다. 주위 사람들을 향해 칼을 휘젓는 괴한과 변 씨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언제 누가 먼저 서로를 공격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수 있기에 방심할 수 없는 대치 상황이 이어졌다.
"막상 칼을 든 괴한이 저를 죽이려고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무섭고 두려운 생각에 온몸이 뻣뻣해지고 멍해지더라고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도 없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릿속이 하얗게 됐죠."
그때 조금 앞에서 떨어져 걷고 있던 송 씨와 이 씨가 달려왔다. 송 씨는 목덜미에 피를 흘리고 있는 오 씨를 끌어다가 안전한 곳으로 옮긴 뒤, 경찰에 재빨리 신고를 하고 다시 괴한 옆으로 다가왔다. 괴한의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고, 자칫 잘못 나서면 무고한 시민들이 큰 화를 입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이 씨가 먼저 나섰다. 괴한의 시선에서 약간 옆으로 비켜 서 있던 이 씨가 괴한의 허리를 잡고 넘어뜨린 것이었다. 그러나 괴한의 손에 있던 칼에 이 씨도 상처를 입었고, 그 모습을 보면서 이번에는 변 씨가 괴한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송 씨가 괴한의 칼을 빼앗으려고 달려들었다가 가슴 쪽을 약간 찔려 피가 나는 상처를 입었다. 그렇게 일행이 괴한과 난투극을 벌이는 가운데 변 씨도 칼로 턱을 긁히고 팔 안쪽을 괴한에게 물리기도 했다. 그때 건너편에서 이 상황을 보고 있던 시민 조경환(31) 씨가 횡단보도를 건너와 떨어진 칼을 잡았고, 때마침 도착한 경찰에게 괴한을 인계하면서 사건은 마무리됐다.
‘생활 속 작은 영웅’으로 선정
사회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선행 할 터
변 씨는 몇 개월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괴한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생긴 칼에 의한 상처는 어느 정도 아물었는데 이에 물린 흉터는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괴한은 ‘조현병(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괴한은 이후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서초경찰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격투 끝에 괴한을 제압한 변 씨 일행 4명과 시민 조 씨에게 표창장과 상금을 수여했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지난 10월 31일 국민대통합위원회도 이들을 ‘생활 속 작은 영웅’으로 선정해 영웅패를 수여했다.
▶서초경찰서는 괴한을 진압한 시민 5명(변재성, 송현명, 이동철, 오주희, 조경환 씨. 왼쪽부터)에게 표창장과 상금을 수여했다. ⓒ변재성
"시상식에 참석하신 분들을 보니 저희보다 훨씬 훌륭하신 분들이 많아서 상을 받는다는 게 무척 쑥스러웠습니다. 시상식을 보면서 앞으로도 일상생활 속에서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대법원에서 함께 근무하는 4명은 아직도 만나서 그때 일을 얘기하곤 한다. 변 씨는 "동료인 오 씨가 목을 다친 상황이었기에 괴한을 제압해야 무고한 시민들이 다치지 않을 것 같았다"며 "무척 두려웠지만 서로를 위해 싸워주는 동료들이 함께 있었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송 씨 역시 일행 중 맏형으로서 괴한 진압에 최선을 다했다. 송 씨는 "동료들 중 제가 형이었기 때문에 동생들을 보호하고 싶었다"면서 "다들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리고 저희만 한 것도 아니고 다른 시민까지 합세해서 좋은 결과를 이뤘다"고 말했다.
괴한의 공격으로 목에 상처를 입은 오 씨는 "살면서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어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면서 "괴한이 뒤에서 갑자기 덮쳐 경황이 없었는데, 상처가 조금 더 깊었으면 크게 위험할 뻔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최근 들어 무고한 시민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묻지마’ 흉기 난동 사건이나 살인 사건이 늘어나고 있다. 이번 교대역 흉기 난동 사건은 다행히 건장한 성인 남성들의 도움 덕분에 큰 피해자 없이 마무리됐다. 하지만 그 상황에 힘없는 노약자나 여성이 있었다면 이 사건은 되돌릴 수 없는 큰 사건이 될 수도 있었다. 변 씨는 이 같은 위기 상황이 생겼을 때 방관하지 않는 시민의식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저희가 그 위급한 상황에서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적극적인 대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빨리 경찰에 신고했고, 괴한과 대치 중에 그를 진정시키려 노력했고, 남자 여럿이 그를 상대하면서 제압할 수 있다는 기세를 보여줬거든요. 괴한에게 기를 눌리지 않고 맞설 수 있었기에 제3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목숨을 걸고 괴한과 싸운 덕분(?)에 이들 4명은 이후 사이가 더욱 돈독해졌다. 만날 때마다 "너희 아니면 큰일 날 뻔했다"며 서로에게 공을 돌린다.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자는 데 의견을 맞추곤 한다.
"일상으로 돌아와 저희 모두 잘 살고 있지만 그날 이후 삶에 대한 자세가 조금씩 달라졌어요. 앞으로 책임감을 갖고 이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은 물론, 사회가 좀 더 밝아질 수 있도록 선행을 실천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글· 김민주(위클리 공감 기자) / 사진·홍태식 기자 2016.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