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5월 초 인천 연수구 송도동의 한 아파트 단지. 주차된 차를 들이받은 승용차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차 안에는 의식을 잃은 운전자가 타고 있었다. 이를 발견한 경비원이 소화기를 뿌려보지만 불길은 쉬이 잡히지 않고, 화염은 더욱 커지며 폭발음을 냈다. 이때 현장을 지나가던 한 젊은이가 다가와 벽돌로 조수석 유리창을 연신 내리쳤다.
"아저씨, 빨리 나오세요."
불길이 운전석까지 번질 때쯤 깨진 유리창을 통해 차 문을 연 젊은이가 안전띠를 풀고 운전자를 흔들어 깨웠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운전자는 몸에 불이 붙은 채 뛰쳐나왔다. 몇 분 뒤 소방차가 출동한 뒤에야 불길은 사그라졌다.
편의점 새벽 아르바이트 중 사고 목격
벽돌로 창문 부숴 의식 잃은 운전자 구조
긴박했던 순간, 운전자를 구한 건 순찰을 돌던 아파트 경비원 현인수(64) 씨와 인근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이재천(23) 씨였다. ‘시민 영웅’을 찾아간 편의점에서 만난 이 씨는 편의점 유니폼을 입은 채 일상으로 돌아간 모습이었다. 그런데 조끼에 달린 명찰이 눈에 띈다. 이름 앞에는 ‘경영주’라는 세 글자가 박혀 있다.
"이번 주부터 편의점을 직접 운영하고 있어요. 그날 사건 후 본사에서 점포를 내줬거든요. 제가 편의점을 빛냈다고요(웃음)."
당시 아파트 안에서 구조현장을 촬영하고 있던 아파트 주민 두 명은 이를 방송사와 편의점 본사에 제보했고, 사건은 각종 미디어를 통해 전파를 타며 세상에 알려졌다. 편의점 본사에서는 이씨의 용기를 치하하는 동시에 방송을 통해 편의점 홍보 효과가 컸다는 이유로 이 씨를 표창하고점포를 내준 것이다.
이 밖에도 이 씨는 국민안전처를 비롯해 인천시와 연수구, 인천남동소방서 등 7개 기관에서 표창을 받았다. 편의점 휴게실 안에는 표창장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그는 이를 보여주면서도 "당연히 할 일을 한 것뿐"이라며 "함께 운전자를 구조한 경비원 아저씨가 매체에 나오길 꺼려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아침 6시가 좀 넘었을 거예요. 아르바이트 마감 정리를 하고 있는데 경비 아저씨가 다급하게 부르시더라고요. 이른 아침이니 주변에 아무도 없었거든요. 의식을 잃은 운전자가 액셀러레이터를 계속 누르고 있는 바람에 엔진이 과열돼 불길이 점점 더 크게 번지고 있었어요. 운전자가 기침을 하는데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더라고요. 출근시간이라 소방차도 늦게 오고요. 사람들이 무섭지 않았냐고 물어보는데 상황이 너무 다급해서 그런 생각이 들 겨를도 없었어요. 누구나 그 상황에선 저처럼 행동했을 거예요."
▶아파트 주민이 촬영한 사고 당시 모습. 이 씨가 운전자를 구조하기 위해 벽돌로 창문을 부수고 있다.
여전히 현장에 남아 있는 보도블록의 검은 그을음은 당시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려준다. 운전자는 얼굴과 팔에 화상을 입어 한 달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다행히 이 씨와 현 씨는 별다른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40대 남성 운전자는 가끔 이 씨를 찾아와 고마움을 표시하며 안부를 전한다고 했다.
운전자 보며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나
"편의점 점주로 변신… 어려운 사람 더 도울 것"
사고 당시만 해도 그는 군대에서 전역한 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도와줘야 내가 힘들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운전자를 봤을 때는 자신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이 씨의 아버지는 그가 중학생 때 돌아가셨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그는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생계에 매달려야 했다.
그러면서도 늘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지나치지 못했다. 지하철에서 껌을 파는 할머니를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고, 텔레비전에서 해외 기아 아동 후원 프로그램을 보면 자연스레후원 전화를 걸었다. 비영리단체인 밀알복지재단에는 매달 1만5000원씩 1년째 기부하고 있다. 젊은 친구들이 기부하는 걸 본 적이 드물다고 하니 "영화 한 편 덜 보고 밥값 조금 아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며 부끄러워했다. 그의 영웅적 행동은 우연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운전자분을 봤을 때 그분도 어느 한 가정의 아버지일 거고 가족들이 있을 텐데 꼭 구해드려야겠단 생각이 들었죠. 가족을 잃은 슬픔이 얼마나 큰지 잘 아니까요. 평소에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살아야 내가 힘들 때 손 내밀 수 있지 않겠어요? 저도 나름대로 힘들게 살고 있었기에저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힘들지 감정이입이 돼요."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조용한 청년은 이제 지역사회의 영웅이 됐다. 그는 사건이 알려진 뒤 ‘인천의 영웅’, ‘인천의 캡틴’, ‘사장님’ 소리를 듣고 있다. 프로야구 구단 넥센 히어로즈에서는 그가 ‘진짜 영웅’이라며 시구를 부탁했다. 이 씨는 친구들이 "다시 봤다. 네가 제일 출세했다. 앞으로 잘 보여야겠다"고 치켜세운다며 웃어보였다.
그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내 누리소통망(SNS)에 올라온 시민들의 메시지를 보여줬다. ‘영상을 보고 눈물이 났어요. 덕분에 대한민국은 아직 따뜻한 것 같아요’라며 감동을 전한 이도 있고, ‘경찰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데 재천 씨의 용감함을 보고 꿈이 더 커졌어요’라며 감사를 전한 이도 있다. 시민들은 하나같이 ‘모르는 분께 말을 걸기가 민망하지만’, ‘갑자기 당황하실 수도 있겠지만’이라고 조심스럽게 서두를 시작하면서도 자신이 느낀 감정을 진솔하게 전했다. 이 씨는 심지어 구애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했다. 그 역시 일일이 장문의 메시지로 화답했다.
▶불타는 차량에서 운전자를 구조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점주가 됐다. 주인공 이재천 씨.
이제는 아르바이트생 네 명을 고용하는 어엿한 점주가 됐지만 그는 여전히 평일엔 아침 8시부터 자정까지 일을 한다.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서다. 달라진 위치에 꿈의 크기도 더 커진 터, 큰 꿈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건 그보다 더 큰 노력뿐이다. 세상을 대하는 삶의 태도부터 달라졌다.
"앞으로 점포를 서너 개로 더 늘리는 게 꿈이에요. 야간대학에 진학할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제가 젊기 때문에 더 주목받았다고 생각하는데 그만큼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많은 분들의 응원을 받아 이 자리에 온 만큼 어려운 사람들도 더 돕고 싶습니다."
글· 조영실(위클리 공감 기자) / 사진· 조영철 기자 2016.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