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일 오전 부산 기장군 곰내터널. 하늘엔 구름이 잔뜩 끼었고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빗물이 고여 있던 도로는 미끄러웠다. 그 시각 어린이 통학버스는 곰내터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버스엔 어린이 21명과 보육교사, 운전기사 등 총 23명이 탑승했다.
사고는 예고편이 없다. 불시에 들이닥친다. 그날 그때도 그랬다. 빗물에 미끄러진 버스가 중심을 잃고 순식간에오른쪽으로 ‘쿵’ 하고 넘어졌다. 차량에서 불꽃이 튀었다. 말 그대로 아수라장. 지난 9월 세상을 놀라게 한 곰내터널 버스 전복 사고의 경위는 이랬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승객 전원이 안전띠를 맨 덕분이었다. 하지만 큰 사고를 모면할 수 있었던 이유가 또 있었다. 터널을 지나던 시민들이 힘을 모아 공동으로 구조작업을 벌여 2차 사고를 막았다. 빛나는 시민의식을 보여준 ‘시민 영웅’은 총 12명. 사고 당시 어린이들을 구조한 시민 11명과 버스에 탑승하고 있던 보육교사 1명이다.
이들 모두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9명은 부산 시민이었고, 나머지 3명은 일 때문에 부산에 왔다가 사고 현장을 목격한 군산, 안양, 창원 주민이었다. 연령대는 17세청소년부터 63세 장년층까지 다양했다. 회사원뿐 아니라 기술자, 자영업자도 있었다.
이들은 서로 일면식이 없었지만 구급대가 사고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함께 구조작업을 벌였다. 버스 안에 갇힌 어린이들이 무사히 밖으로 나왔고, 구조대가 도착해 사고 현장이 정리되자 이 시민 영웅들은이름과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홀연히 사라졌다.
이들의 선행은 사고 현장 블랙박스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다. 누리소통망(SNS)에선 잔잔한 감동이 일었다. 많은 누리꾼들이 "시민 영웅 12명이 곰내터널의 기적을 만들었다"고 댓글을 달았다. 9월 6일 부산경찰은 누리소통망에 ‘곰내터널영웅들을 찾습니다’라는 글을 올렸고, 일부 누리꾼이 해당 뉴스를 퍼 날랐다. 구조작업이 마무리된 지6일 만인 9월 8일 부산경찰이 수소문 끝에 12명의 시민 영웅을 찾아 감사장을 수여했다.
어린이 통학버스 넘어지자 김 씨가 구조 활동 주도
망치로 유리창 부수자 시민들 골프채·펜치 들고 동참
‘곰내터널의 기적’을 만든 12명 시민 영웅 중에는 김호신(63) 씨가 있었다. 그는 "구조작업이 종료돼 내 할일은 끝났다고 생각해 갈 길을 갔다"고 말했다. 김씨는 사고 당시 버스가 넘어지자마자 버스 쪽으로 가장 먼저 달려왔다.
▶곰내터널의 기적을 만든 시민 12명 중 한 명인 김호신 씨는 “의인으로 포장된 모습이 부끄럽다”며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지방경찰청 박재군 경위는 "어린이 통학버스를 뒤따르던 차량의 운전자가 김 씨였고, 버스가 넘어지자마자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 주변 차량에 탑승하고 있던 시민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며 "김 씨가 침착하게 구조 활동을 벌인 덕분에 구조대가 도착하기 전 승객들이 무사히 버스를 빠져나올 수있었다"고 말했다.
김 씨가 재구성한 사고 당시 상황은 이렇다. 건설 자재를 가지러 부산에서 울산으로 가던 그는 화물차를 몰고 곰내터널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에 어린이 통학버스가 진입을 시도했다. 김 씨가 브레이크를 살짝 밟아 길을 비켰고, 버스가 먼저 터널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갑자기 버스가 오른쪽으로 ‘쿵’ 하고 엎어졌다. 버스를 뒤따르던 김 씨의 입에서 ‘어어어’ 외마디가 터져 나왔다. 빗길에 미끄러진 버스는 완전히 옆으로 넘어졌다. 김 씨는 갓길에 화물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려 곧장 버스 쪽으로 뛰어갔다. 달리는 와중에 주변 차량 운전자들을 향해 ‘경찰에 신고해달라’고 요청했다. 김 씨의 외침을 들은 30대 남성 운전자가 경찰에 신고했다.
"사고 당시 버스가 넘어지면서 불꽃이 튀었어요. 폭발로 2차 사고가 발생할까 우려됐지만 사고 현장부터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버스에 탑승한 어린이들과 보육교사, 운전기사는 안전띠를 매고 있던 터라 의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습니다. 어린이들이 ‘도와달라’, ‘꺼내달라’ 외치더군요. 하지만 버스가 넘어지면서 출입문이 바닥에 깔린 상태였어요. 승객들을 구조하기 위해 버스 뒤쪽 유리창을 깨려고 발로 찼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불현듯 김 씨의 머릿속에 평소 차량에 넣어두고 다니는 망치가 떠올랐다. 유리창을 깨부순다면 승객들이 빠져나올 출구를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혼자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주변 시민들에게 손짓하며 ‘함께 구조하자’고 도움을 요청했다. 곧 시민들이 사고 현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골프채, 펜치 등 유리창을 깰 수 있는 도구가 들려 있었다. 시민들이 힘을 합쳐 유리창을 살살 두드려 깼다. 덕분에 탈출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린이가 깨진 유리창 사이를 빠져나오는 건 위험했다.
자칫 유리에 긁혀 다칠 염려가 있었다. 김 씨가 유리창을 통과해 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안에서 어린이를 붙잡으면 밖에서 시민들이 받아주는 식으로 구조 활동을 벌였고, 버스 안에 갇혔던 어린이 21명과 보육교사, 운전기사는 무사히 구조됐다. 김 씨와 시민들은버스에서 구조된 어린이들을 차량이 지나다니지 않는 안전한 터널 가장자리로 대피시켰다.
▶시민들의 구조로 버스에서 무사히 탈출한 21명의 어린이가 안전하게 대피한 모습.
"구조된 승객들 중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린이 2명이 이마와 무릎에 상처를 입었지만 가벼운 타박상이었어요. 버스 밖으로 나온 어린이들이 부모를 찾으며 울먹이더군요. 문득 우리 손주들이 생각났어요. 어린이들을 달래주며 마음을 진정시켰죠."
평소 안전교육 받은 것이 사고 대응 능력 키워
선행 이후에도 평소와 똑같은 생활
김 씨는 선행이 알려진 뒤에도 평소와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현재 그는 부산에 위치한 온천에서 안전관리요원으로 근무한다. 오히려 김 씨는 "의인으로 포장된 모습이 부끄럽다"며 "내가 아니어도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씨가 예기치 않은 사고에도 침착하게 구조작업을 벌일 수 있었던 건 평소 안전교육을 받은 덕분이었다. 화학공장에서 오래 일하며 안전교육과 위기 대응 능력을 키운 것이 사고 당시 기민하게 구조작업을 하는 데 도움이 됐다.
▶버스에 갇힌 승객들을 구조하기 위해 유리창을 깰 때 사용한 김 씨의 작업용 망치.
"차량이 지나다니는 터널에서 버스가 넘어져 2차 사고가 우려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구조대가 오기 전에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사고로 출혈이 있거나 인공호흡이 필요한 부상자가 있을지 모르니까요."
김 씨가 이번 일을 계기로 느낀 것은 ‘시민들의 힘’이다. 여러 사람이 힘을 모은 덕분에 신속하게 구조 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
"저 혼자 구조작업을 벌였더라면 승객들을 무사히 구조할 수 없었을 겁니다. 작은 힘이라도 한데 모이면 기적을 만들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글· 김건희(위클리 공감 기자) / 사진· 김도균 기자 2016.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