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으로 물 마시러 가는 용의 기세를 닮았다”

2022.07.17 최신호 보기

▶‘남산여삼각산도’(18세기 후반, 개인소장). 표암 선생이 둔지산 두운지정에서 남산을 바라본 전경. 그림 속 마을이 둔지미 일부분이다. 

역사 속 용산
오늘날 서울 용산은 미군기지로 각인돼 있지만 이전에는 일본군기지가 있었던 곳이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직후의 일이다. 일본은 한일의정서(1904년 2월 23일)에 근거해 일본군 주둔을 위한 대상지로 용산을 정했다. <용산을 읽다 용산을 걷다> 저자인 역사학자 한애라 보담역사문화연구소 대표가 100년 전 용산을 이야기한다.

▶1910년(측도 연도) 경성(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구용산, 신용산, 둔지방, 둔지미가 표시돼 있다.

▶1860년대 김정호가 그린 ‘경조오부도’에 보이는 둔지산과 용산. 두 산 사이의 물길이 만초천이다.

# 둔지산, 둔지미, 둔지방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의 본래 지명은 잊혔습니다. 일본이 거대한 규모의 병영을 설치하면서 역 앞 일대를 일본인을 위한 새로운 도시, ‘신용산’으로 개발했어요.”
용산 역사에서 만난 한애라 보담역사문화연구소 대표의 첫마디였다. 그렇다면 진짜 용산은 어디에 있을까? 한애라 대표는 옛 지도를 보여주었다. 19세기 초 무렵의 한양도성과 성저십리(한양도성 밖 십리, 4km 이내의 지역) 일대가 잘 나와 있는 지도다. 도성 서쪽 인왕산과 무악(안산)에서 뻗어나간 산줄기가 만리현과 효창묘를 거쳐 한강 변으로 향한다. 그 끝자락에 용산(龍山)이 있다.
한 대표는 “용산의 산줄기가 뻗어나가는 모습을 두고 용의 기세와 닮았다고 또는 용이 한강으로 물 마시러 가는 형국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마포구와 용산구의 경계”라는 설명이다.
지도를 보면 조선 후기 용산방은 지금은 복개된 만초천(蔓草川)의 서쪽인 청파역과 공덕리, 그리고 마포나루 일대에 걸쳐 있었다. 용산방의 많은 지역이 오늘날 마포구에 속한다.
용산(龍山) 자락의 흔적을 지금 찾고자 한다면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앞역과 지하철 5·6호선 공덕역 사이의 용마루고개로 가보자. 효창공원에서 한강 쪽으로 흘러내리는 구릉에 아파트 단지가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다. 그곳이 용산(龍山) 자락이다. 그 정상에 천주교 용산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고층아파트로 인해 시야가 많이 좁아졌지만 성당에서 한강이 내려다보인다.
옛 지도에서 오늘날 용산으로 불리는 곳을 찾아봤다. 일본이 신용산으로 개발한, 오늘날 미군기지와 대통령 집무실이 자리한 곳에 ‘둔지산(屯之山)’이 적혀 있다.
한 대표는 “산과 그 일대에 들어선 마을이 있었고 주민이 대대로 살고 있었다”며 “둔지산과 둔지미 마을이 있던 지역은 조선시대에 한성부 남부 둔지방(屯之坊)이라는 행정구역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 대표는 “김홍도의 스승인 표암 강세황이 말년에 둔지산 정상에 지은 두운정에서 북쪽의 풍경을 그린 ‘남산여삼각산도’을 보면 남산 아랫마을인 둔지미 일부분이 보인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둔지산 일대를 강제수용하고 각종 기지 시설에 ‘용산’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둔지미 주민들은 지금의 보광동 일대로 쫓겨났다. 일본군이 물러난 곳에 미군이 주둔하며 한 세기가 지나고 사람들은 차츰 둔지산, 둔지미, 둔지방이란 본래의 이름을 잊어버리게 됐다.
한 대표를 비롯해 많은 전문가와 용산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시민단체들이 ‘용산 둔지산 제자리 찾기 시민연대’를 결성해 빼앗긴 땅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둔지산과 둔지미 마을 주민들의 젖줄이었던 만초천의 흔적은 용산기지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개통 당시의 용산 역사 모습

▶1906년 2층 규모의 서양식 목조건물로 새로 지어진 용산역사. 아래 철길이 보인다.

▶경의선 개통 후 용산 역사 모습을 담은 조선엽서

▶용산우편국 부근에서 삼각지 방향을 바라본 풍경(수원광교박물관 소장). 도로가 뻥 뚫리면서 용산역이 개발됐다.

# 그리고 ‘신용산’의 탄생
조선시대 도성 밖 마을은 어떻게 한순간 조선 최고의 지역으로 변모했을까? 한 대표는 “철도가 들어오면서 천지가 개벽했다”고 말했다. 1900년 한강철교가 개통되면서 노량진역까지만 오가던 경인선이 한강을 건너 용산역을 거쳐 도성 바로 옆 서대문역까지 이어졌다.
경인선 경유지였던 용산역과 그 일대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은 1904년 무렵. 대륙 침략의 야욕을 품고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1904년 2월 경의선을 군용철도로 부설하겠다는 방침을 정하고 한 달 만에 용산과 개성 간 철도부설을 시작했다. 한 대표는 “일본군까지 동원한 경의선 부설공사는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졌다”며 그 결과 “공사 2년 만에 용산에서 신의주까지 전 구간을 개통했다(1906년 4월 3일)”고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막대한 토지와 엄청난 노동력이 수탈당했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역 앞의 광장에서 한강로로 이어지는 방사형 도로도 병참 수송을 위해 뚫은 길이다. 1914년에 경원선까지 들어오면서 그야말로 철도 운행의 요충지라는 위상을 차지하게 됐다.
용산역 주변으로 철도 관련 시설이 옹기종기 모이고 건축·토목·금융 등 기업 사무소가 곳곳에 자리하면서 일대는 순식간에 새로운 시가지로 탈바꿈했다. 용산역을 중심으로 격자형의 규칙적인 도시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바로 새로운 용산 ‘신용산’의 탄생이다.

글 심은하 기자, 사진 제공 한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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