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말인지 2022년 초인지 모르겠다. 밤 11시쯤 친구가 내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나에게 죽음을 생각해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언제나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친구는 나에게 죽고 싶다는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고 있냐고 물었다. 나는 친구에게 정말 신기하다며 바로 얼마 전 이 질문에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2021년은 내게 ‘삼재’가 나간다는 날삼재의 해였다. 명리학의 통계적 특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기간을 꽤 어둡게 보냈다. 순탄히 진행됐어야 할 일들이 계속 어그러졌고 정신이 피폐해졌으며 몸이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아 일은커녕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이 일을 그만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자니 살길이 막막했고 먹고살기 위해 이 일을 계속하자니 오히려 얼마 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죽으려면 어떻게 죽어야 하나, 살려면 앞으로 뭘 해서 먹고사나. 온종일 이 생각을 하다가 허기가 지면 자몽 맛 홀스를 한 줄 몽땅 까서 입 안에 넣고 천장을 바라봤다. 자몽 맛 홀스는 일하며 먹으려고 몇 주 전에 한 상자나 사둔 것이었다.
그렇게 누워서 세월을 흘려보내다가 약간 기운을 차렸을 무렵, 그날은 마트에 갔다. 기분을 전환하고 싶은데 갈 만한 곳이 마트밖에 없었다. 입맛도 없는데 습관대로 이것저것 담다 보니 들고 간 가방 두 개가 가득 찼다. 나는 양손에 가방을 들고 낑낑대며 길을 걸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바꾸고 싶었지만 가방이 너무 무거워서 주머니에 있는 휴대전화에 손을 가져가지조차 못했다. 죽네 사네 하며 내내 누워 있었던 주제에 양손 가득 먹을 것을 사서 들고 가는 모습이 내가 봐도 기가 막혔다.
6차선 도로에는 차들이 달리고 있었고 그 차들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횡단보도 뒤에서 주황색인지 보라색인지 모를 배경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과거에 이 직업을 간절히 원하지 않았던가? 이것을 겨우 가졌는데 왜 이 일 때문에 이렇게나 힘들어할까? 내 나이에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을까? 그런데 문득 이 질문이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학에 입학했을 때도, 원하는 회사에 입사했을 때도, 회사를 박차고 나왔을 때도 처음 몇 달간은 기뻐했지만 얼마 후에는 그것들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살겠구나. 그런데 이렇게 생각이 이어지자 의외로 머릿속이 말끔해졌다.
하고 싶은 뭔가가 나타나면 그것을 즐겁게 하면서 살면 되겠다.
다음에도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그것을 이루고, 그것에 질려 벗어나고 싶어 할 거라면 마지막 직업을 찾기 위해 일생일대의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고 싶은 뭔가가 나타나면 그것을 마음껏 좋아하고 그것에서 마음이 떠나면 집착하지 말고 놓아주자. 그리고 또 다른 좋아하는 것을 찾아 그것을 하면서 살자. 나는 장을 본 가방을 들고 성큼성큼 횡단보도를 건넜다. 달리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양손의 짐 때문에 그것이 최선이었다.
나는 그날의 이야기를 친구에게 들려주었다. 나는 이렇게 살기로 결심했고 죽음은 한 번은 반드시 온다고, 우리는 공평하게 한 번은 죽으니 나는 이렇게 살다가 그날을 기쁘게 맞이하겠다고 말했다. 친구는 내 말을 듣다가 그날 마트에 가서 뭘 샀냐고, 맥주를 사서 기분이 좋아진 게 아니었냐고 웃으며 물었다. 나는 그런 것도 같다며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조금 더 수다를 떨다가 전화를 끊었다.
김은경 출판 기획 에디터 겸 작가_ 12년 차 에디터. <에세이를 써보고 싶으세요?>를 썼다. 2022년에는 ‘성장’과 ‘실행’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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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