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경
며칠 전 반충동적으로 요가를 가르치겠노라 선언했다. 그간 ‘워런 버핏과 영혼이 바뀐다면 내 몸은 분명 다른 인생을 살겠지’라는 상상을 종종 했는데 한평생 내 방식대로만 살아봤으니 이제는 다른 식으로도 살아보자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생에서 절대 1순위가 될 수 없는 행위들을 적어봤고 한 달만 요가를 중심으로 살아보기로 했다. 오전 10시 수련을 기준으로 업무를 1부와 2부로 나누었고 내친김에 지인에게 요가를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이 시도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기대하는 한편 누굴 다치게 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이 정도 가지고 뭔가가 바뀌려나 의심도 된다.
이런 순간마다 떠올리는 영화가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베넷 밀러 감독의 <머니볼>로 미국 메이저리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구단주조차도 포기한 만년 꼴찌 야구 팀이다. 그러다 보니 점차 돈을 쓰지 않는 팀으로 바뀌었고 좋은 선수를 영입하기는커녕 직접 육성한 선수들마저 빼앗기는 실정이다. 화가 난 단장 빌리(브래드 피트)는 경제학을 전공한 피터(조나 힐)를 영입해 새로운 방식으로 팀을 꾸리기 시작한다.
피터는 메이저리그에서 눈길도 주지 않는 선수들을 찾아 빌리에게 추천한다. 그 근거는 출루율인데 스트라이크로 출루하든, 볼을 잘 봐서 출루하든 그라운드로 진출하는 선수를 영입해야 승률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빌리는 피터의 이론에 따라 팀 내 촉망받는 인재(라고 쓰고 ‘고평가된 선수’라 읽는다)들을 방출하고 실력 없는(이라고 쓰고 ‘저평가된 선수’라 읽는다) 선수들을 영입한다. 물론 감독에게는 욕을 엄청나게 먹는다. 그리고 이렇게 모인 선수들이 역사에 길이 남을 경기를 펼친다.
이 영화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영화 초반, 피터는 빌리를 앉혀두고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앞으로 어떤 선수를 기용해야 할지 설명한다. 어떤 선수가 왜 저평가됐는지를 말하는 동안 수많은 데이터가 화면 가득 잡히고, 앞으로 변화를 예고하듯 의미심장한 주제가(OST)가 피터의 대사 밑에 묵직하게 깔린다. 그리고 정전이라도 된 듯 그 OST가 갑자기 팍 사라진다.
그다음 장면은 피터의 사무실이다. 함께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빌리는 없고 피터 혼자 골방 같은 그곳에 앉아 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작은 프린터가 “지이이잉” 소리를 내며 종이를 뿜어낸다. 둘이 검토한 선수 리스트일 것이다. 음악은 없다. 햇빛도 안 들어온다. 빛나는 미래를 암시하는 듯한 말을 하는 사람도 없다. 프린터만이 소음을 내며 일하고 피터는 팔을 들어 종이를 잡는다.
대단한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한들 현재에는 그것을 알 길이 없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역시 훗날 역사에 길이 남을 경기를 펼치지만 둘이 선수를 기용할 때 그런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무언가를 예고하는 듯한 OST나 복선은 관객을 즐겁게 하기 위한 영화 속 장치다. 반면 골방, 작은 프린터, 프린터가 일으키는 소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 앉아 있는 주인공, 이것이 당시의 실제 모습이었을 것이다.
나는 뭔가를 시작하려 할 때 종종 이 장면을 떠올린다. 어마어마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만 이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대단한 OST도 무언가를 암시하는 대사도 없는 거라고. 지금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 보이겠지만 분명 무언가가 일어나는 중일 거라고. 클라이맥스가 빛나려면 이 장면이 꼭 필요하다고. 이렇게 생각하면 두려움을 잠재우고 훗날을 기대할 수 있다. 이 장면을 넣어준 베넷 밀러 감독에게 감사하며.
김은경 출판 기획 에디터 겸 작가_ 12년 차 에디터. <에세이를 써보고 싶으세요?>를 썼다. 2022년에는 ‘성장’과 ‘실행’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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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