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그 작고 호사로운 평화

2022.05.23 최신호 보기




글·그림 기쿠치 치키 / 황진희 옮김
책빛

동물들이 사는 숲에 눈이 내린다. 솜사탕 같은 폭신폭신한 눈, 숲이 술렁인다. 기쿠치 치키 작가의 붓끝에서 눈은 온통 아름다운 색으로 피어난다. 분홍 테두리를 두른 눈과 보랏빛 나무들에 달린 초록 이파리들. 자연이 아름다운 홋카이도의 겨울은 이토록 특별하게 예쁜 걸까? 걸까? 기쿠치 치키 작가가 태어나고 자란 홋카이도가 궁금해진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눈발이 점점 세지고 동물들의 움직임 또한 엄청난 속도감으로 달린다. 재빠르게 물감을 찍어내는 작가의 역동적인 붓놀림에서 편안한 자유가 느껴지고 동물들의 표정과 움직임은 놀랍도록 생생하다. 숲속 눈밭을 동물들과 함께 뛰고 싶어진다. 화들짝 달아나는 여우, 토끼 한 마리 물고 뛴다. 남은 한 마리 하얀 토끼가 안쓰럽다. 온통 고요한 눈 세상, 하얀 천지에 새 한 마리 날고 있다.
‘내려라 내려라 눈아 내려라 펑펑 내려라.’
온통 아이들 세상, 눈밭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환호 소리 들린다. 세상의 색을 다 모은 것 같은 알록달록한 빛이 동심의 세계를 비춘다. 눈밭을 뒹구는 아이들의 한바탕 신나는 축제를 보며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친구들과 설악산을 갔던 스무 살 겨울, 온통 눈 세상으로 변한 아침, 무릎까지 빠지는 눈에서 뒹굴다가 삽을 들고 함께 만든 이글루에 들어가 포근했던 기억, 서른 즈음, 앞집 옆집 이웃들과 함께 간 축령산, 너른 산비탈에서 까만 고무 튜브에 엉덩이를 얹고 신나게 눈썰매를 타다 내려오는 가속도에 안고 있던 아이가 앞으로 튕겨 나가 등이 긁혔던 몹쓸 에미.
‘갑자기 내리는 눈으로 대관령에 차들이 엉금엉금 기고 있습니다.’ 이런 뉴스가 나올 때면 눈 내리는 풍경에 닿고 싶었던 소망, 기적같이 꿈이 이루어진 날. 강원도에서 직원연수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던 길, 대관령 중턱쯤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앞이 안 보이는 폭설로 순식간에 모든 차들이 엉금엉금 기었고, 기다리기 지루한 사람들은 차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야호! 내게 비로소 대관령 눈길을 걸을 수 있는 절호의 순간이 온 것이다. 뒤로 힐끔힐끔 멈춰있는 차를 보면서 대관령 휴게소까지 두어 시간을 걸어 휴게소에서 조금 남은 음식을 모조리 쓸어왔던 기억, 그때가 마흔이었다.
유년 시절, 눈 내리면 뛰어나가 손등이 터져 피가 나도 추운 줄 모르고 종일을 뛰어다녔던 행복이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김연옥 독서습관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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