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전자제품 매장에 진열된 세탁기│ 연합
보호무역주의 세력의 ‘WTO 흔들기’에 철퇴
세계무역기구(WTO)가 최근 우리나라와 미국의 세탁기 긴급수입제한(세이프가드) 분쟁에서 우리나라의 손을 들어줬다. 이번 결정의 의미는 단순히 두 나라 간 세탁기 분쟁에 그치지 않는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불을 당긴 악명 높은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세력에 제동을 걸었다는 적잖은 의미가 있다. 트럼프는 재임 기간 동안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WTO를 무력화시키려고 애썼다. 트럼프의 횡포에 시달렸던 WTO가 이번에 제대로 존재감을 과시한 셈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WTO는 2월 8일 미국의 세탁기 세이프가드 조치의 WTO 협정 합치 여부를 다툰 분쟁에서 우리 정부의 손을 들어주고 패널 보고서를 WTO 회원국에 회람했다. 세이프가드는 특정 품목의 수입이 급증하거나 보조금 지원 또는 원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수입될 때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제도다. 미국과 멕시코 간 무역협정에 있던 면책조항이 모델이 돼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 도입됐고 WTO 체제에서도 인정된다.
“미 긴급수입제한 조치, WTO 협정에 불합치”
앞서 미국 가전업체 월풀은 2017년 삼성전자와 LG전자가 해외에서 생산해 미국으로 수출하는 가정용 대형 세탁기가 자국 산업에 심각한 피해를 주고 있다며 세이프가드를 청원했다. 트럼프 미 행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2018년 2월부터 세탁기 수입물량에 최대 30%의 관세를 부과하는 세이프가드를 발효했다. 이 조치의 유효기간은 3년으로 예정대로라면 2021년 종료됐어야 했다. 하지만 미 행정부가 월풀의 연장요청을 받아들이면서 2023년 2월까지로 기간이 늘었다.
우리나라는 이 조처가 WTO 협정에 불합치한다고 보고 2018년 5월 제소했고 핵심쟁점 5개 모두에서 위법 판정을 받아냈다. 5개 쟁점은 ▲수입 증가 ▲국내산업 정의 ▲국내산업 피해 ▲수입 증가와 국내산업 피해 간 인과관계 ▲예견치 못한 전개다. 미국의 세탁기 수입 증가로 인한 피해가 세이프가드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고 조치의 적용과 보호대상인 산업 범위, 인과관계에 대한 논리가 부족하다는 게 WTO의 판단이다.
미국이 이번 판정 결과를 수용하면 세이프가드 조처는 해소된다. 반대로 미국이 이번 결정에 불복해 상소하면 현재의 분쟁 상태는 지속된다. 미국은 패널 보고서 회람일로부터 20일 후, 60일 이내에 상소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이번 판정 결과는 국내 가전업계의 대미 세탁기 수출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세탁기 분쟁에 대비해 삼성과 LG가 미국 현지에 공장을 세운 뒤 수출보다는 현지 생산과 판매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국가안보 핑계로 세탁기까지 수입 제한
그렇지만 이번 결정은 트럼프로 상징되는 미국 보호무역주의 세력의 ‘WTO 흔들기’에 반격을 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트럼프는 집권하자마자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앞세워 세계 무역질서를 마구 흔들어댔다.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는 트럼프 이전 정부 때도 있었지만 트럼프는 과거 정부와 차원이 달랐다.
그는 대선 후보 시절부터 WTO에 대해 노골적 불만을 나타냈다. WTO가 주요 2개국(G2) 중 하나인 중국을 여전히 개발도상국으로 취급하면서 각종 우대 혜택을 부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에 대한 불만은 미국뿐 아니라 다른 회원국들도 나타냈지만 트럼프처럼 자국 우선주의를 노골적으로 내세우지는 않았다.
트럼프는 2018년 세탁기와 태양광 패널 등에 세이프가드를 발동하면서 ‘국가안보’를 이유로 댔다. 이는 1962년 미국 무역확장법(Trade Expansion Act)에 있는 조항으로 해당 수입 품목이 국가안보를 해칠 경우 적용하는 것이다. 국가안보 이슈인 탓에 상대방이 적절한 대응 수단을 찾기 어렵게 한다. 따라서 석유와 같은 원자재에 한해 매우 드물게 적용됐다.
하지만 트럼프는 가정에서 쓰는 세탁기까지 국가안보 핑계를 댄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의 폭주에 대항하기 위해 유럽연합(EU)과 중국 등이 미국 농산물에 보복 관세를 물리면서 결국 피해는 미 농부들한테 돌아갔다. 국민이 아닌 기업의 이해를 대변한 트럼프의 통상정책은 세계 무역질서를 흔들었을 뿐 아니라 자국 국민도 힘들게 만든 셈이다.
이춘재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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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