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엽, ‘최초의 만찬’, 캔버스에 유채, 50×100cm, 2019
에른스트 곰브리치(1909~2001)와 H.W. 잰슨(1913~1982)은 각각 유럽과 미국을 대표하는 미술사학자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곰브리치는 런던에서 살았고 러시아에서 태어난 독일계 미국인 잰슨은 뉴욕에서 활동했다. 그들의 대표 저서, 즉 곰브리치의
와 잰슨의 는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는 스테디셀러다. 참고로 는 1983년 이후 아들 A.F. 잰슨이 개정 증보 작업을 맡았다.
이 책들은 진작에 우리 말로도 번역 출간됐다. 제목은 둘 모두 <서양미술사>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나? 서양미술사라고? 영어 원제목 어디에도 서양(the West, Western)이라는 단어는 없는데? 그런데도 ‘서양미술사’라고 번역됐다. 무릇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다. 저자들은 세계가 ‘서양-백인-남성’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굳이 ‘서양’이라고 따로 표기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헤아리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사는 전적으로 그들 ‘서양-백인-남성’ 입장에서 서술된 역사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미술사를 정설로 받아들이고 주류로 상정한다. ‘서양-백인-남성’의 관점을 은연 중에 동일시하고 비판 없이 수용한다.
▶정정엽, ‘식사준비’, 캔버스에 유채, 162×372cm, 1995
남성중심 사회서 제 목소리를 내는 여성화가
‘빅 히스토리(Big History)’라는 개념을 주창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우주적 관점에서 인류의 역사를 조망하고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시각으로 지구의 미래를 통찰하자고 제안한다. 분야 간 경계를 허물고 지역이나 국가, 민족 같은 인위적인 구분을 넘어서자고 주장한다. 여러 면에서 동의한다. 그렇다면 페미니즘(미술)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벨 훅스(1952~2021)는 페미니즘을 ‘세상의 모든 성차별주의를 종식시키기 위한 사상과 실천, 운동’이라고 정의했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국내외 가릴 것 없이 그동안 여성 미술-작가는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차별받았다. 정당한 재평가가 절실하다.
작가 정정엽은 우리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여성주의 미술운동에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1962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나 1985년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를 민중미술 진영과 노동운동 현장에서 뜨겁고 치열하게 관통했다. 미술작가로서 본격적인 행보는 대학 졸업 10년 후 첫 개인전부터였다. 1995년 당시 전시제목은 ‘생명을 아우르는 살림’. 어머니, 봄나물, 밥상을 차리기 위한 식재료, 비닐봉지를 들고 장을 보는 여성을 그린 작품(‘식사준비’) 등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정정엽은 여성-화가로서 경험하고 짊어진 삶의 문제를 그림의 주제로 삼았다. 결혼과 출산, 육아와 살림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여성의 삶, 그 속에서 포착한 일상의 리얼리티를 작품에 올곧이 담았다. 땅 위에서 땀 흘리는 농부처럼 정정엽은 캔버스 위에서 고단하게 그림 농사를 짓는다. 첫 개인전 이후 쉼 없이 20여 회에 이르는 개인전을 열었다. 굵직굵직한 전시에도 많이 참여했다. 눈여겨볼 만한 작품 두 점을 간략히 소개한다.
▶정정엽, ‘봇물’, 캔버스에 유채, 162×112cm, 2000
팥 알갱이로 구현한 여성주의
먼저 2000년 작 ‘봇물’. 제목처럼 뭔가 터져서 한꺼번에 쏟아져 흘러내리는 모습이다. 붉은색 점은 팥 알갱이다. 하나하나 붓으로 꼼꼼히 그렸다. 크기도 실제 팥과 비슷하다. 그래서 더욱 사실적으로 보인다. 팥 알갱이가 하나일 땐 그저 작은 점처럼 단순한 조형 요소일 뿐이지만 수천수만 개가 모이면 사정이 달라진다. 점은 면이 되고 면은 형상을 만들고 컬러도 차츰 두드러지면 그림이 돼간다. 서서히 완성돼 가는 작업과정은 엄청난 노동력과 집중, 몰입이 필요하다. 어지간한 신념이나 목표 의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정정엽은 팥이나 콩 같은 곡물과 고들빼기, 냉이, 달래, 밭 두릅, 당귀 같은 푸성귀를 주요 소재이자 테마로 삼았다. 하나같이 예술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볼품없는 대상이다. 하지만 정정엽 그림에선 생명에 대한 은유이자 여성성, 모성애를 표출하는 상징으로 재탄생된다.
2019년 제작된 ‘최초의 만찬’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작품이다. 제4회 고암미술상 수상기념 개인전에 출품됐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 12명은 모두 여성. 서양-백인-남성의 전형적인 표상인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다. 화가 나혜석, 고릴라 가면을 쓴 게릴라 걸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평화의 소녀상처럼 알아볼 만한 얼굴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왼쪽에서 세 번째는 김혜순 시인이다. 네 번째는 태국여행에서 만난 노점식당 아주머니란다. 그리고 그 옆에 포옹하는 두 인물은 일본 ‘미투운동’의 상징 이토 시오리와 서지현 검사가 모델이다.
정정엽은 남성이 주인공이었던 역사-만찬을 끝냈다. 그리고 같은 자리에서 여성이 주체가 된 ‘최초의 만찬’을 베풀었다. 이런 의도는 이성간 갈등과 대결을 부추기고자 함이 아니다. 그림으로나마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고 화해를 꿈꾸자는 유쾌한 반란을 표현한 것이다.
이준희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_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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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