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정 화가가 자신의 2016년 작품 <내숭동산>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한국화의 아이돌’ 김현정 화가
선화예중·고를 거쳐 서울대 동양화과 졸업. 2013년 데뷔 전시회 〈내숭 이야기〉 출품작 13점 이틀 만에 완판. 2016년 개인전 〈내숭 놀이 공원〉 국내 최다 방문객 6만 7402명 기록.? 2017년 미국 경제지 <포브스> ‘아시아에서 영향력 있는 30세 이하 30인’ 선정.
이력만 보면 실패 없이 탄탄대로만 달렸을 것 같은 김현정(35) 화가는 여느 청춘처럼 성장통을 심하게 앓았다고 털어놓았다. 경쟁이 유난히 심했던 학창 시절을 보내며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가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는 다른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미워 우울증까지 앓았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의 ‘내숭’을 그림으로 표현한 게 ‘내숭 시리즈’였다.
2021년 12월 23일 서울 서초구 김현정아트센터 사무실에서 만난 김현정 화가는 “고상한 한복을 입은 젊은 여성의 고상하지 못한 행동을 그림으로 표현하자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면서 날 선 마음은 빠져나갔고 우울증도 이겨낼 수 있었다”며 “‘나도 이런데, 혹시 너도 그러니?’,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잖아, 이런 모습을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교 미술 교과서에 실린 ‘떨림’ | 김현정아트센터
누리소통망 팔로어 20만 명에 기업과 협업
김현정 화가를 대표하는 수식어는 ‘한국화의 아이돌’이다. 그는 “화가 하면 중장년을 떠올리는데 내가 젊고 가수처럼 팬덤(열성팬) 문화를 형성해 아이돌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김현정 화가의 누리소통망(SNS) 팔로어는 20만 명에 달한다. 그가 누리소통망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이유는 시대에 관심을 기울이고 관객의 반응을 바로 알기 위해서다. 관객과 직접 대화하며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도 얻을 수 있다. 작품에 달리는 의견은 생활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김현정 화가는 “작품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누리소통망에서 의욕과 자신감을 얻어 작품 활동에 다시 집중할 수 있다”며 “어느새 작업의 일부분이 돼버렸을 정도”라고 말했다.
미술도 음악처럼 대중이 일상생활에서 쉽게 향유할 수 있기를 바라는 그는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은 작업을 마쳤을 때가 아니라 관객과 소통할 때”라고 했다. 그래서 기업과 협업(컬래버레이션)에도 적극적이다. 신용카드, 음료, 샴푸 등 다양한 제품의 광고 작업을 진행했고 최근에는 한 제과업체의 양갱 포장 디자인을 ‘일월오봉도’와 ‘십장생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병풍 그림으로 표현했다.
김현정 화가는 “기업과 컬래버레이션은 전시회가 아니면 작가와 관객이 양방향으로 소통하기 어려운 미술의 특성을 보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미술이 음악처럼 대중적 문화로 되려면 상업적 매체에 적극적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월오봉도’와 ‘십장생도’를 현대 스포츠로 재해석한 ‘신십장생도’| 김현정아트센터
신기술 등 변화 적극적… NFT는 부정적
김현정 화가가 누리소통망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다양한 사람과 소통을 통해 새로운 정보와 기술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예술 분야라고 예외일 수 없다”고 단언했다. 구글의 인공지능(AI) 화가인 ‘딥 드림’이 그린 그림은 1억 원에 낙찰됐다. AI 프로젝트인 ‘넥스트 렘브란트’는 렘브란트 특유의 화풍을 구도, 색채, 유화 질감까지 모방·재연했다. 그는 시대적 변화를 외면하기보다 증강현실(AR), 가상현실(VR) 등의 기술을 잘 활용해 재미있는 작업을 시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처럼 새로운 분야를 개척할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2013년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이 새해 연두교서에서 3차원(3D) 프린터 산업을 언급하는 것을 듣고 ‘내숭녀’를 3D 프린터로 작업했고 아이들이 갖고 놀 수 있게 페이퍼 토이(종이를 소재로 한 조립형 장난감)를 개발하기도 했다. “빠르게 변화하고 그 변화를 즉각 반영하는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게 행운”이라는 김현정 화가는 “앞으로 우리나라의 창작 분야는 더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할 것이고 이 모든 변화를 빠르게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고 했다.
그의 작품 표현법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리나라 전통 기법인 선과 요철법 위주로 표현하다 최근에는 명암법을 섞어 표현한다. 배경을 여백으로만 표현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초기 작품과 달리 요즘에는 배경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도전하기를 즐기는 그가 모든 변화를 받아들이는 건 아니다. 2021년 미술계는 NFT(대체 불가 토큰)가 유행하면서 디지털 예술품 거래 열풍이 불었다. 크리스티 경매에선 디지털 예술가 비플의 작품이 6930만 달러(약 783억 원)에 낙찰됐고 국내 첫 NFT 미술품 경매에선 마리킴의 작품이 288이더리움(약 6억 원)에 팔리며 화제가 됐다.
하지만 김현정 화가는 “NFT는 작품에 사용하는 기술적인 게 아니라 작품 가격에 대한 것이어서 조심스럽다”며 “아이디어 구상부터 6개월 정도 걸리는 작품을 진짜 사랑받는 곳에 보내고 싶은 마음인데 미술 작품을 단순히 투자나 투기 대상처럼 보는 건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교과서에 작품 실린 ‘롤 모델’ 책임감 강해
그래서 김현정 화가는 옥션(미술품 경매시장)에도 작품을 내지 않는다. 돈에 눈이 멀었다가 쪽박을 찰 수 있고 사람이 대박을 노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름달을 볼 때면 “딱 노력한 만큼만 성과를 내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다고 했다.
20대에 이미 ‘한국화의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은 그지만 “너무 큰 관심을 받아도 불행해지는 건 순식간”이라며 꾸준히 오래가는 화가가 되길 원했다.
“화가는 40대도 신진 작가라고 얘기하거든요. 그러니까 나는 거의 신생아 작가인 셈이죠. 가라앉지 않고 버텨야 하는 시간이 아직도 한참 남은 거예요.”
김현정 화가의 작품은 2015년부터 각종 중고교 미술 교과서에 실리고 있다. 그의 작품을 보고 미술을 배우는 학생들의 ‘롤 모델’로서 책임감이 인터뷰 내내 묻어났다. 그는 “대학생 때 입시 과외를 하면서 만난 학생들은 대부분 화가라는 진로에 회의적이었다”며 “이들에게 훌륭한 선배이자 ‘롤 모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화가의 출발점”이었다고 말했다.
현재 여러 대학에 강의를 나가고 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 강의로 전환하면서 아쉬움이 크다. 그는 “대학 강의는 돈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한테 에너지를 받으려고 하는 건데 온라인 강의에선 쉽지 않다. 대학 생활을 못 하는 학생들이 불쌍한 것 같다”고 했다.
한편으론 지금 미술을 공부하는 학생들에 대한 아쉬움도 있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것만 좇으면 안 되고 안부터 기본기를 탄탄하게 쌓아나가야 무너지지 않는 거잖아요. 그런 자세를 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이런 조언을 하면 꼰대스러울까 봐 조심스러운데 나도 나이가 들었나봐요.”
세계에 한국화 알리는 ‘문화 전도사’ 꿈꿔
K-팝, 드라마, 영화 등 우리나라의 문화를 세계인이 나누고 있지만 미술은 상대적으로 대중적 저변이 두텁지 못한 게 현실이다. 특히 동양화와 한국화는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화의 매력과 아름다움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문화 전도사’를 꿈꾸는 김현정 화가는 새해에는 한국화를 세계적으로 널리 알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활동할 계획이다.
그는 최근 한류와 관련된 예술가끼리 모인 자리에서 들은 K-팝 안무가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K-팝의 성공 요인을 청각적 요소에서 찾는 게 아니라 시각적으로 해석한다고 하더라고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게 K-무비, K-드라마, K-뷰티, K-패션 등 한류에서 공통점을 찾는다면 다 시각적인 거잖아요.”
그렇기에 ‘손재주가 뛰어나고 눈이 매서운’ 우리나라 사람의 K-미술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특히 우리나라의 독특한 정서를 담은 한국화를 그리는 작업에 매진하는 작가가 많다는 점은 K-미술의 큰 자산이다. 그는 앞으로 재기 발랄한 상상력과 무궁무진한 아이디어로 한국화의 매력과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싶다고 밝혔다.
“저 어릴 때만 해도 가수 한다고 그러면 ‘딴따라’라고 손가락질했는데 지금은 가수 하고 싶다고 하면 학원 보내주잖아요. 왜 바뀌었을까 생각해보면 아이유 같은 ‘걸어 다니는 1인 중소기업’이 나타나서잖아요. 화가도 배가 고프지 않을 수 있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고 직업으로서 가치가 높아졌으면 좋겠어요.”
그가 이미지 저작권 분야에 관심을 쏟는 이유기도 하다. 음악은 오랜 노력의 결과 사람들이 저작권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림의 이미지 저작권은 인식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이미지 저작권 관련 기관과 시설이 생겨나고 있긴 하지만 투명하고 공정하게 보호할 수 있는 시스템은 아직 부족하다”며 “공모전이나 국가지원사업도 콘텐츠 선정과 데이터 보관 등 자료시스템이 더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22년 새해에는 더 많은 사람이 미술이 주는 아름다움과 감상의 즐거움을 누리길 바라는 김현정 화가는 “코로나19로 웃음을 보기 어려워진 각박한 삶이지만 내 그림을 볼 때만큼은 ‘아우 웃겨’, ‘발칙해’라고 해준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고 희망했다.
글 원낙연 기자, 사진 곽윤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