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천군 유부도에 있는 서천 갯벌에 농게가 해변 모래 속 유기물을 섭취하려고 모래를 삼킨 뒤 둥근 공 모양으로 다시 뱉어내고 있다. 덕분에 펄이 정화된다.│한겨레
김승옥 단편소설 <무진기행>의 배경인 전남 순천만은 11월에 가장 많은 관광객이 몰린다. S자로 휘감아 도는 선명한 갯골을 경계로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빛의 방향에 따라 붉은색과 황금색으로 옷을 갈아입는 갈대꽃의 변주는 설명 불가한 대자연의 신비를 선물한다. 해풍에 갈댓잎이 부대끼며 빚어내는 오케스트라의 향연은 귀까지 호강하게 한다.
순천만은 갈대밭(5.4㎢)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지만 사실 면적으로 따지면 갯벌(22.6㎢)이 훨씬 더 크다. 그런 덕에 인간이 먹고살기에 좋은 땅은 아니다. 연안이 뻘밭이고 수심이 얕아 항구가 들어설 입지가 아니라서 해상교통 발달에도 불리하고 농사지을 평야도 없다. 그런데 척박한 자연환경의 역설은 순천만에 ‘생태의 보물 창고’라는 수식어를 안겨줬다. 순천만의 갈대밭과 갯벌은 식물 340여 종과 조류 240여 종이 살아 숨 쉬는 전 세계 동식물의 안식처다.
▶전남 순천에 있는 순천만에 S자 모양의 갯골 사이로 붉은색과 황금색을 띤 갈대밭이 바다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한겨레
2021년 7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선정
이 천혜의 자연을 유네스코도 세계자연유산으로 인정했다. 2021년 7월 유네스코가 ‘서천 갯벌(충남)과 고창 갯벌(전북), 신안 갯벌(전남), 보성·순천 갯벌(전남)’ 네 곳을 ‘한국의 갯벌’로 묶어 세계자연유산으로 올린 것이다. 흔한 갯벌이 세계자연유산이라니 코웃음이 날 법도 한데 어쩌면 너무 흔해서 그 가치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세계자연유산은 제주도가 유일했으니 그 뒤를 이어 세계자연유산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만 보더라도 ‘한국의 갯벌’이 지닌 가치를 새삼 실감할 수 있다. ‘한국의 갯벌’은 지구 생물 다양성의 보존 차원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서식지 중 하나인 데다 멸종위기 철새의 기착지로서 가치가 크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우선 갯벌의 정의부터 짚고 넘어가자. 갯벌은 조류로 운반돼온 미세한 흙이 해안에 오랫동안 쌓여 형성된 평탄한 지형이다. 워낙 장구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지기 때문에 구체적 형성 과정은 베일에 싸여 있다. 퇴적물 입자 크기에 따라 갯벌 유형이 다른데 펄(점토) 갯벌(모래 비율 20~30%)과 모래 갯벌(모래 비율 70% 이상), 혼성 갯벌(모래 비율 40~70%)이 있다.
갯벌은 전 국토의 2.4%에 이를 정도로 많다. 전부 서남해안에 몰려 있다. 이 가운데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갯벌’은 전체 갯벌의 51%다. 세계 5대 갯벌 중 한 곳으로 꼽히는 강화도 남단 갯벌 등 남은 49%는 세계자연유산에서 빠졌다. 왜 그럴까? 갯벌 보전으로 인한 이익보다 개발 이익에 무게를 둔 해당 지방자치단체가 세계자연유산 등재에 부정적이라서다. 세계자연유산에 오른 명칭이 ‘한국의 갯벌’로 돼 있기는 하지만 사실 ‘신안 갯벌(전남)’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이 지역 갯벌이 세계자연유산으로 오른 ‘한국의 갯벌’ 가운데 85%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새 서식지이자 번식지
‘한국의 갯벌’은 철새와 갯벌 생물의 서식지이자 번식지이며 휴식지의 기능을 한다. 한반도와 중국 사이에 있어서 동아시아-대양주 철새 이동로의 한가운데에서 중간 기착지로 대체 불가한 존재다. 특히 갯벌 4곳 모두 세계적으로 희귀한 멸종위기종의 중요한 서식지다.
대표적 희귀종은 서천 갯벌에서 관찰되는 넓적부리도요다. 부리 끝이 주걱 모양처럼 생긴 넓적부리도요는 야생동물 가운데 멸종 가능성이 가장 큰 동물 등급인 멸종위급종에 해당한다. 태평양 북부 해역인 베링해에서 번식하는 넓적부리도요는 전 세계에 300~600마리 정도만 생존한다. 봄과 가을 이동 시기에 수십 마리의 개체가 서천 갯벌에 모습을 드러낸다. 멸종위기종인 알락꼬리마도요도 서천 갯벌에서 볼 수 있는 희귀종이다.
겨울 철새를 상징하는 흑두루미는 순천만 갯벌의 귀한 손님이다. 천연기념물(제228호)이자 멸종위기종인 흑두루미는 하늘길을 따라 남북을 자유롭게 이동해 평화의 메신저로 불린다. 2021년은 10월 중순에 이미 월동을 앞두고 선발대 세 마리가 순천만 갯벌에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관찰됐다. 흑두루미는 갯벌에서 게와 갯지렁이 등 동물성 먹이를 잡아먹는다. 흑두루미와 함께 노랑부리저어새도 순천만 갯벌의 터줏대감이다.
‘한국의 갯벌’은 멸종위기에 놓인 동식물이 기댈 수 있는 생명 연장의 귀한 터전이다. 갯벌에 삶을 의탁하는 건 어쩌면 인간도 마찬가지다. 텃밭 한 평 가꿀 수 없는 메마른 땅에서 배 없이도 바다의 풍부한 식재료를 공급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까닭에 ‘한국의 갯벌’ 생태계를 구성하는 갯마을 주민들의 억새 같은 삶도 보이지 않는 세계자연유산이다.
김정필 <한겨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