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구석구석 명품 길을 걷다
길은 세상의 이치를 아우르는 만능열쇠와도 같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인가 하면 연결고리로 사람과 사람, 공간을 연결하고 세대를 잇는다. 문화도 역사도 길 따라 펼쳐졌다. 없던 길은 누군가 걸어서 만들었고 뒤 따르는 자들은 그 길 위에 인간의 살가운 창조를 곁들였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길들이 즐비하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미국의 태평양 종단길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Pacific Crest Trail), 일본 규슈 올레 등은 전 세계 여행객들의 로망으로 통한다. 우리나라에도 이들 못지않은 명품 길이 생겼다. 이른바 ‘코리아둘레길’이다. 기존 각 지역의 둘레길을 연결해 대한민국의 외곽을 아우른다.
코리아둘레길은 총 4544㎞에 이르는 국내 최장의 걷기 여행길이다. 이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의 10배이자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의 5.6배에 이른다. 코리아둘레길은 비무장지대(DMZ) 평화의길, 동해의 해파랑길, 남해의 남파랑길, 서해의 서해랑길을 한데 묶었는데 사람과 자연, 문화를 만나는 걷기 여행길을 연결해 국제적인 도보 여행 코스 구축을 목표로 삼고 있다.
코리아둘레길의 맏형 격은 2016년 개통한 동해안 해파랑길이다.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동해안의 해변길,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750km 걷기여행길이다. ‘남쪽의 쪽빛바다와 함께 걷는 길’이라는 남파랑길(2020년 개통)은 한려해상국립공원~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에 이르는 1463km 해안 길을 걷는다.
서해안의 바닷길을 잇는 서해랑길은 해남 땅끝마을부터 인천 강화까지 110개 코스, 1804km의 명품 길이 2022년 3월 완성된다. 한반도의 허리를 연결한 DMZ 평화누리길은 인천 강화군에서 강원 고성군까지 DMZ 인근 접경 지역 526km를 잇는 도보길이다.
우리나라는 가히 ‘걷기 길 천국’이다. 코리아둘레길을 비롯해 자연과 역사, 문화 등 소중한 유산을 품은 다양한 테마의 길들이 즐비하다. 코로나19가 온 국민을 갑갑한 일상에 가두고 있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거리두기 실천이 가능한 코리아둘레길 등 전국의 호젓한 명품 길을 찾아 나서는 것은 어떨까?
▶망우역사공원에 잠들어 있는 주요 인사들을 소개한 안내판
망우역사문화공원과 중랑둘레길
국민의 절반 이상이 살고 있는 수도권, 그중에서도 서울 지역의 가볼 만한 길을 추천해본다. 특히 코로나19가 진행형인 상황에서 어디 멀리 떠나기가 여의치 않은 요즘이다. 이럴 경우 썩 괜찮은 걷기 여행지가 있다. 서울 중랑구에 자리한 ‘망우역사문화공원과 중랑둘레길’이다. 호젓한 자연 풍광 속에 우리 근현대사의 주요 인물들이 잠들어 있고 주변에는 살가운 삶의 터전들을 함께 거느리고 있어 울림이 있는 여행지로 다가온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즈음 선인들의 자취를 따라 걸으며 삶의 의미를 되새기고 우리의 내력과 오늘 그리고 내일을 그려본다.
▶설산 장덕수 선생 유택 이정표
한 해의 끝자락 삶을 되새기는 시간
망우역사문화공원 ‘사색의 길’
서울 동부지역, 중랑구에 자리한 망우역사문화공원은 유관순 열사, 만해 한용운, 소파 방정환, 죽산 조봉암, 시인 박인환, 가수 차중락('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등 우리 근현대사를 장식한 애국지사, 정치인, 문화예술인 등 숱한 인물들이 잠들어 있다. 이들의 자취를 따라 완만한 '사색의 길'이 이어지고 서울시의 대표적 무장애길인 중랑둘레길(총 연장 6㎞)이 연달아 펼쳐져 있다.
망우리공원은 일제(1933년)때부터 1973년까지 서울시민의 공동묘원이었다. 이후 정비사업을 거쳐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고 숲과 산책로를 따라 애국지사 묘역을 만나는 역사문화공원으로 탈바꿈했다.
망우역사문화공원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탐방코스로는 역사문화코스와 사잇길, 이른바 사색의 길이다. 총 길이는 5km남짓(각 2.5km), 완만한 산책로를 따라 잠든 선인들을 만나며 공원 숲길을 음미하기에 적당하다.
탐방은 곧 개장을 앞두고 있는 중랑망우공간에서부터 시작한다. 지척엔 유관순열사묘역이 조성돼 있다. 묘역엔 ‘이태원묘지무연고분묘합장묘비’도 함께 세워져 있는데 이장 과정에서 열사의 유골을 분실해 무연고 유골들과 함께 추모비를 세우게 됐다. 거친 자연석에 새겨진 묘비가 애잔함을 더 불러일으킨다.
사색의 길은 망우역사공원을 한 바퀴 도는 코스다. 느릿하게 두어 시간 동안 역사 속의 인물들과 교감하고 숲길을 걷다가 이내 서울의 멋진 풍광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전망 좋은 길이 곳곳에 이어진다. 먼저 박인환 시인의 묘소가 길 초입에 조성돼 있다. 양지 바른 유택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마와 숙녀’의 시구가 감성을 자극한다. 그는 탁 트인 중랑구 전경과 멀리 북한산-도봉의 자락을 굽어보며 누워있다.
산책로는 나목과 지각 월동준비에 나선 수목이 어우러져 초겨울의 서정을 짙게 드리운다. 발길을 옮기는 도중 화가 이중섭, 문인 최학송, 계용묵 등 교과서에서 만났던 익숙한 이름의 묘비석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 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대체로 여유로운 발걸음을 옮긴다. 사색의 길이라는 이름처럼 그만큼 생각거리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우리 근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들의 삶을 반추하며 내 삶도 되새길 수 있는 시간들이다. 그래서 망우역사문화공원길은 한 해의 끝자락에 더 잘 어울리는 코스가 아닐까 싶다.
2km 남짓 숲길을 걷다보면 중랑둘레길(자락길)과 만나는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반환점을 삼거나 윗길로 둘러 가면 사색의 길이 이어진다. 탁 트인 한강변과 구리방면을 바라보고 걸을 수 있는 사색의 길 코스에서는 장덕수, 노필(영화감독), 조봉암, 한용운, 문일평, 오세창 등의 유택을 만나고 팔각정에서 다리쉼도 할 수 있다.
▶중랑둘레길은 남녀노소 가족단위 나들이객이 주를 이룬다. 특히 애완견과 함께 숲길을 걷는 이들도 적지 않다.
▶조봉암 묘소. 이 길을 따라가면 한용운의 유택과 한강 전경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박인환 시인의 유택
북한산, 도봉산 자락이 파노라마처럼
중랑둘레길(자락길)
사색의 길 반환점(화장실)에서 용마경로복지센터(02번 마을버스 종점)까지는 그야말로 명품 무장애길(2.2km)이 이어진다. 길 전체가 나무데크로 휠체어, 유머차를 끌고도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길이다.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단풍나무, 자작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숲을 이루고 있는데 초겨울 나목과 낙엽이 어우러져 낭만의 숲길을 연출한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숲속 데크길을 걷다보면 고마움이 느껴진다. 숲이 주는 매력, 바로 심신을 다독여 주는 힘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청신한 숲내음, 낙엽 냄새와 촉감 등 이내 마음이 편안해지며 이게 행복인가 싶은 생각이 절로 솟는다.
데크길은 디자인 감각이 돋보인다. 데크길 가드레일의 한쪽 편을 낮추고 그 상단의 폭을 넓히니 편안한 다리쉼터로 변신하게 된다. 더불어 가드레일 상판 아래에 조명을 심어 발길을 은은하게 비춰주니 해질녘, 밤길에도 안전 산책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게 바로 2% 부족함을 채워주는 명품 인프라가 아닐까 싶다.
중랑둘레길의 묘미는 하산 전망이다. 서울의 서편을 바라보며 하산하기 때문에 중랑구는 물론 서울의 강북과 북한산, 도봉산 자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야경은 환상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여행메모
가는 길 망우역사공원 서울 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 4번 출구, 청량리역환승센터에서 경기버스 65번, 167번, 51번을 타고 약 20분 이동, 망우역사공원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도보로 15분.
뭘 먹을까? 서울 지하철 7호선 사가정역 4번 출구 인근 무교동낙지, 면북초교 인근 용마해장국, 면목시장앞 사가정역 인근 순댓국집이 토박이 추천 맛집이다.
김형우 한반도문화관광연구원장(관광경영학 박사)_ 신문사에서 20년 동안 관광전문기자로 활동하며 전 세계 50여 개국, 전국 각지의 문화관광자원 현장과 정책을 취재했다. 지금은 한반도문화관광연구원을 통해 한반도관광 활성화, 대한민국관광 명품화 작업에 나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