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수, ‘어떤 섬’, 장지에 채색, 116.8×91cm, 2017
‘굶주림’은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요즘 같은 시절에 사람들이 겪는 굶주림은 꼭 배가 고파서만이 아니다. 먹는 거 말고 뭔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지 못해서 굶주려하는 사람이 많다. 마음껏 하지 못하는 일, 바로 여행이 그렇다. 어디론가 훌훌 떠날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긴 지 오래됐다. 특히 여권을 챙겨 국제선 비행기에 탑승하는 설렘으로 시작하는 해외여행에 허기진 사람이 많다. 나 역시 그렇다. 전 지구적 재앙인 코로나19로 하늘길이 막힌 까닭이다. 이제 서서히 단계적 일상회복으로 태세가 전환되는 분위기다. 안정적으로 일상을 회복하는 그때를 조심스레 기다린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우리에겐 제주도가 있다. 해외여행을 못해서 겪는 갈증을 제주도 여행으로 조금은 달랠 수 있다. 배 타고 갈 수도 있지만 짧게나마 하늘을 날아 바다를 건너 찾아가는 제주도는 말 그대로 해외여행 기분을 살짝 맛볼 수 있는 곳이다.
▶김현수, ‘정원과 나무’, 장지에 채색, 160×160cm, 2021
▶김현수, ‘창밖에서’, 장지에 채색, 135×135cm, 2018
이국적인 풍경을 그리는 젊은 화가
이국적인 제주도 자연 풍광은 수많은 화가에게 특별한 영감을 주었다. 비록 유배를 온 신세였지만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세한도’라는 명작을 남겼다. 이중섭도 6·25전쟁 중에 서귀포에 머물렀다. 지금도 강요배, 김보희, 이왈종 등 여러 유명 화가가 제주도에 살면서 그림을 그린다. 이런 원로 거장들과 비교하기엔 아직 부족함이 있지만 제주도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 젊은 화가 김현수를 소개한다.
김현수는 제주도가 고향이다. 그곳에서 나고 자라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줄곧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그림은 왠지 제주도스럽다. ‘제주도스럽다’는 느낌을 말로 정확히 설명할 순 없다. 다만 ‘육지 화가’가 그린 제주도 풍경화와는 분명히 뭔가 다르다. 인위적이지 않고 억지스러운 구석이 없는 자연스러움이라고나 할까.
특히 그가 즐겨 쓰는 색채, 즉 짙고 어두운 초록색 계열 물감 색에서 이런 인상은 선명히 감지된다. 김현수 그림 전반을 지배하는 색채는 곶자왈을 연상시킨다. 대낮에도 어두컴컴할 정도로 무성히 우거진 제주의 원시림, 곶자왈 그늘 속을 한 번이라도 거닐어본 사람이라면 이 말에 공감할 거다.
이뿐만 아니다. 새까만 현무암 돌담이나 물에 젖은 고구마 빛깔처럼 검붉은 흙길 표현은 또 어떤가? 제주도 자연의 생태와 특유의 미감을 원초적으로 체득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처럼 독특한 색채 표현이 쉽지 않으리라.
김현수 그림은 회화적으로도 풍부한 얘깃거리와 볼거리를 제공한다. 짙은 초록색 향연 못지않게 화면을 구성하는 조형 요소도 흥미롭다. 치밀한 스케치나 정돈된 밑그림 없이 쓱쓱 마음 내키는 대로 거침없이 붓을 움직여 그린다. 이런 붓놀림의 속도감이 그대로 드러나는 화면은 탄탄하면서 안정적으로 구축된다. 따라서 평면성이 두드러지지만 묘하게 입체적인 공간감도 풍부하다.
게다가 절묘하게 어울린 화면의 여백은 그림을 전체적으로 풍성하게 만든다. 이 여백은 때론 바다를 연상시키는 은유적인 요소로도 읽힌다. 동심원처럼 표현된 형상 덩어리가 섬을 상징한다면 그것을 둘러싼 여백은 사방을 둘러싼 바다로 상상해볼 수도 있다.
▶김현수, ‘빈집’, 장지에 채색, 206×720cm, 2019
하늘에서 본 제주, 그림으로 재현
이 밖에도 이국적인 모양을 지닌 갖가지 나무와 식물이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찬찬히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겼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김현수의 그림은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며 느끼는 제주도의 첫인상과 많이 닮았다. 완만하고 펑퍼짐하게 흘러내린 한라산 자락, 봉긋 솟은 오름, 마치 거대한 조각보를 펼쳐놓은 듯 구불구불 자연스레 돌담을 쌓아 경계를 구분한 밭의 아름다움이란! 용암이 굳어 형성된 새까만 암석 부딪혀 부서지는 흰 파도의 해안선은 또 어떤가? 이런 제주도의 첫인상이 김현수 그림 곳곳에 담겨 있다.
아직은 젊은 그의 그림이 앞으로 어떻게 변모할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제주도에서 발아된 화가의 정체성은 변치 않을 것 같다. 진정성을 잃지 않는 ‘제주 화가’가 되길 응원한다.
이준희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_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