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흙·불·물로 우주 다스리는 황제 신격화

2021.10.18 최신호 보기
▶공기, 캔버스에 유화, 74×56cm, 개인소장(왼쪽) / 흙, 패널에 유화, 70×49cm, 개인소장

시각은 가장 원초적이고 즉흥적이면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놀라운 점은 시각 정보의 특성을 이용해 파격적이고 독창적인 그림을 그린 화가가 16세기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가까이서 보면 정물화처럼 보이는데 떨어져서 보면 초상화로 변신하는 이중 그림의 달인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는 식물과 과일, 꽃, 동물, 새, 사물 등 사람의 얼굴과는 전혀 관계없는 요소들이다. 희한하게도 이런 소재들만으로 사람의 머리와 눈, 코, 입, 귀 등 얼굴 형상을 절묘하게 연출해 깜짝 놀랄만한 초상화를 탄생시켰다니 기발하고 혁신적인 발상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화가의 이름은 주세페 아르침볼도(1527~1593). 이탈리아 밀라노 태생으로 신성로마제국의 궁정화가로 명성을 날린 초현실주의의 시조로 불리는 인물이다. 실제로 초현실주의의 대가 살바도르 달리(1904~1989)는 아르침볼도의 그림을 보고 탄성을 내지른 것으로 전해진다. 달리를 비롯한 초현실주의 화가들 덕분에 아르침볼도의 작품은 현대인들에게 재평가되는 계기가 됐다.
그의 그림은 정물화이면서 초상화이기도 해 정물초상화라 회자되는데 인물화인 그림을 거꾸로 뒤집으면 영락없는 과일 바구니로 탈바꿈하는 등 하나의 그림에서 전혀 다른 두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중 그림으로 불리기도 한다. 요즘에야 기존의 틀을 깨는 과감한 기법을 동원한 그림이 대수롭지 않지만 까마득한 수백 년 전에 이런 그림을 그렸다니 아르침볼도야말로 혁신의 아이콘이 아닐까?

▶불, 나무에 유화, 67×51cm,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박물관 소장(왼쪽) / 물, 나무에 유화, 67×51cm,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박물관 소장

가까이서 보면 정물화, 멀리서 보면 초상화
아르침볼도는 화가인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어릴 때부터 그림을 곧잘 그렸다. 아버지를 따라 밀라노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며 일찌감치 재능을 인정받은 그는 35세 때인 1562년 신성로마제국의 궁정화가로 발탁돼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며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그를 낙점한 사람은 다름 아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1세(1503~1564, 재위 1558~1564),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다. 걸출한 실력에다 인복까지 타고났는지 아르침볼도는 막시밀리안 2세(1527~1576, 재위 1564~1576)에 이어 루돌프 2세(1552~1612, 재위 1576~1612)로 이어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3대에 걸쳐 1587년까지 25년 동안 궁정화가 자리를 지켰다.
아르침볼도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사계(四季)’(1573)와 ‘사원소(四元素)’(1566). 두 작품 모두 막시밀리안 2세를 모델로 한 황제의 초상화다. 아르침볼도는 궁정화가 부임 2년째인 1563년 페르디난트 1세를 모델로 첫 번째 ‘사계’를 그렸으나 루브르박물관에 소장 중인 1573년 작품이 완성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계절 과일과 채소, 식물로 기이하면서도 해학적으로 조합하고 배치해 황제의 얼굴을 묘사한 그림이다. 황제를 사계절을 지배하는 절대 권력자에 비유했다.
막시밀리안 2세가 황제로 즉위하고 2년이 지난 1566년 아르침볼도는 또 한 점의 파격적인 황제 초상화를 선보이는데 ‘사원소’다. 우주를 구성하는 4대 요소인 공기, 흙(땅), 불, 물을 시사하는 이미지를 활용해 황제의 용안을 그려낸 작품이다. 우주를 다스리는 절대 권력으로 황제를 신격화시킨 그림이라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일까? 막시밀리안 2세는 그림을 친견(親見)한 자리에서 파안대소하며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는 후문이다. ‘사원소’ 속 황제의 얼굴 생김새가 괴상망측해 불경죄로 내몰릴까 전전긍긍한 신하들만 머쓱해졌다니 웃음이 절로 난다.
‘사계절’이나 ‘사원소’ 모두 착시현상에 기초한 이른바 눈속임 기법의 정물초상화 이중 그림이다. 그 속에 번뜩이는 기지와 해학, 풍자적인 뜻이 담겨 있다. 황제의 얼굴을 우주의 근원인 사원소로 상징화한 아르침볼도의 착상과 기법도 발군이지만 이중 그림의 속내에 담긴 예술적 우의를 단박에 알아차린 황제의 안목이 없었다면 ‘사원소’도 ‘사계’도 역사에서 사라졌을지 모른다. 아르침볼도와 황제의 이심전심이 새삼 놀랍다.

우주 네 가지 근원 물질을 네 점 초상화로
사원소는 우주의 네 가지 근원 물질을 네 점의 초상화로 형상화한 시리즈 형식의 그림이다. ‘공기’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조류로 ‘흙’은 지상 동물로 ‘불’은 불과 관련된 갖가지 사물로 ‘물’은 다양한 종류의 물고기로 표현했다. 몇 발자국 떨어져서 보면 네 가지 원소 모두 황제의 얼굴 옆 모습으로 의인화된 합성 초상화라는 점에서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림 맨 왼쪽이 ‘공기’. 머리는 온갖 종류의 새들로 묘사됐고 입과 턱은 닭, 몸통은 날개를 활짝 편 공작으로 표현했다. ‘공기’ 옆 ‘흙’ 그림은 네발 달린 짐승들이 총출동한 동물의 왕국이다. 사슴, 산양, 원숭이, 소, 토끼, 멧돼지, 말, 코끼리와 치타, 사자까지 등장한다. ‘흙’ 옆은 ‘불’인데 활활 타오르는 장작더미로 머리카락을 나타낸 게 인상적이다. 대포와 총으로 무장한 몸통에서는 무시무시한 기운이 느껴지며 도화선으로 드러낸 이마도 위압적이다. 반면 불쏘시개로 대신한 콧수염과 쇠 부지깽이로 그럴싸하게 포장한 코와 귀는 익살스럽다. 화가의 창의적인 발상이 놀라울 따름이다.
맨 오른쪽 그림은 ‘물’. 왼쪽 측면 얼굴을 나타낸 그림인데 머리카락에서부터 얼굴과 몸통에 이르기까지 전부 수많은 물고기로 넘실대고 있다. ‘물’ 그림에 동원된 물고기가 자그마치 60여 종이나 된다니 어류도감을 보는 것 같다. 북적대는 물고기들의 틈바구니에서 진주 귀걸이와 진주 목걸이가 눈길을 끄는데 화가의 재치가 돋보인다. 갖은 동물과 사물을 조합한 ‘사원소’로 황제의 얼굴을 기발하게 묘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아르침볼도의 독창적인 발상과 창의적인 구성 능력이 결정적이었다.

박인권 문화칼럼니스트_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스포츠서울>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와 사랑에 빠진 그림> <미술전시 홍보, 이렇게 한다>,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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