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해가네

2021.10.18 최신호 보기
▶서핑을 하고 있는 필자│윤진서

살다 보면 새삼 변해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6년 전의 나 자신은 자연과 고요가 그리워 제주로 가서 숲속 한가운데 집을 짓고 몇 년간 그곳에서 서울의 이야기 따위는 궁금해할 새 없이 여유를 찾아 헤맸다. 오늘의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드라마 촬영을 하며 새벽 2시에 글을 써 마감을 넘긴다.
자연의 섭리를 따라야 한다고 배웠지만 지금까지 나는 그것을 이기고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던 것들을 찾아 더 애써왔다. 그러나 내가 애를 쓴다고 그 섭리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별로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세상은 그 자체로 생명체였고 생명을 가진 것은 원래 자신의 법칙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그 법칙에 휩쓸리며 이리저리 삶의 방법을 찾아 헤매다가 제주로 떠나 잠시 멈춰 숨 고르기를 했을 것이다.
어느 날 인도네시아 발리의 한 서핑 학교에서 만난 크리스 할아버지는 수업 때 이런 말을 했다.
“자연적인 것과 대항을 해보겠다는 것은 인간의 무지에서 나오는 못된 근성 중 하나지. 자연의 흐름을 이해하는 방법을 놀이로 즐기는 것, 그것이 서핑이라고. 파도를 이겨보겠다고 하지 말고 자연스레 내 차례가 오고 파도가 나를 바다 위로 들어 올려줄 때, 그때를 기다려. 그리고 막상 그때가 오면 두려워하지 말고 즐길 줄 알아야 해.”
어쩌면 그 멋진 말에 매료되어 서핑을 계속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훈련법에 따라 모래 위에서 훈련 3일, 보드에서 일어나지 않고 방향 바꾸기 2일, 그리고 발목과 서핑보드를 이어주는 끈인 ‘리쉬코드’ 없이 서핑보드 만으로 파도에서 버티기 2일을 거쳐 먼 바다로 나갔다. 무서움과 동시에 어쨌든 살아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 자체가 희망적이란 생각도 들었다. 저 넓은 곳에서 파도가 나를 들어 올려줄 때를 기다려 파도 위로 올라서 즐겁게 내려오며 나 자신 홀로,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바다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다니. 바다와 친구라도 된 것만 같았다.
그렇게 바다를 친구 삼아 제주에서 삶을 시작할 무렵 제주는 자연과 친구가 되는 방법을 하나씩 가르쳐줬다. 서핑에 기초가 있는 것처럼 자연을 알아가는 데도 기초가 있었다. 정원을 일구기 위해 흙을 먼저 다져야 했고 나무를 심고 씨앗이 꽃이 되는 과정을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바다에 이어 꽃과 나무와도 친구가 됐다.
숲의 소리가 친근해졌고 옆집 아저씨의 화난 듯한 말투가 사실은 친근함의 표시라는 것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비게이션 없이도 제주에서 운전이 편해질 무렵 오랜 숨 고르기를 끝내고 일상으로 복귀했다. 변한 것 없는 일상인 듯 하지만 이전보다 제법 애쓰지 않고 파도를 탈 수 있고 기다리는 일에도 또 다른 재미를 찾았다. 장소가 달라졌을 뿐. 살다 보면 새삼 변해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래서 이 다음 시간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 주말마다 한라산을 올라갈 때 <공감>에 글을 보내기 시작했는데 사계절을 함께 보내고 이제 마지막 글을 보내네요. 에세이를 제안한 <공감> 측과 사계절이 지나는 동안 심심한 제 글을 읽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22년에는 브라운관에서 찾아뵙겠습니다. 건강하세요!

윤진서 배우_ 2003년 영화 <올드보이>로 데뷔 후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으며, 책 <비브르 사비> 등을 썼다. 최근 유튜브 채널 ‘어거스트 진’을 개설했다. 자연 친화적인 삶을 지향하며 제주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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