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운명 걸린 8개월

2021.08.30 최신호 보기
북한이 2020년 6월 9일 남북 통신선을 끊은 지 13개월여(413일) 만인 7월 27일 통신선 복구에 합의해 문재인 대통령 임기 9개월여를 남기고 남북 대화에 다시 불이 붙는 듯 했다.
꺼져가던 불씨가 회생할 조짐을 보였지만 절묘한 시점에 한미연합훈련이라는 예정된 변수가 판을 바꿔버리고 말았다. 한미연합군은 8월 10일부터 13일까지 한미연합훈련 대비훈련 격인 위기관리 참모훈련(CMST)을 실시했고 8월 16~26일 본훈련을 수행했다.
2021년 하반기 한미연합훈련이 사실상 개시된 8월 10일 오전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은 매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김 부부장은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발표한 담화에서 “미국과 남조선군은 끝끝내 정세 불안정을 더욱 촉진시키는 합동군사연습을 개시했다”며 강한 유감을 표했다.
김 부부장의 유감 표현 방식을 보면 단어마다 구절마다 강한 절망과 분노가 스며 있다. 소통 부재가 초래하는 암울한 결론을 암시하는 것 같아 한없이 처연해질 뿐이다. 러시아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는 자신의 인생 명작 〈안나 카레니나〉에서 전체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대주제로 비극은 소통의 부재에서 비롯됨을 설파했다.
훈련 시작 전 미리 어떠한 조치를 취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소통 부재로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 현실화하고 있었다. 남북이 통신선 복원에 합의하며 장밋빛 미래를 그린 지 불과 일주일여 만에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요인은 이미 예견되어 있던 한미연합훈련이었다.

지금 남과 북에 필요한 것은 소통
남북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는 시점에 한미연합훈련을 한다면 북한을 자극할 게 뻔하다. 더군다나 훈련은 ‘작전계획 5015’에 따라 전개된다. 작계 5015에는 북한 핵무기 사용 징후 포착 시 대북 선제타격, 북 지도부 제거를 위한 공격, 북한 급변사태 시 한미연합군 투입 등의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은 2018년 9월 19일 체결된 남북군사합의서에서 지상과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했다. 양측이 사전에 충분한 소통을 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오해를 살 만한 사안이다.
물론 말 못할 사정도 있었다. 정부로서는 전시작전권 환수를 위해 제대로 된 한미연합훈련을 수행해야 했다. 한미는 조건에 기초한 전작권 환수 합의에 따라 3단계 검증 절차를 마쳐야 한다. 이를 위해 양국은 2019년 1단계 기본운용능력(IOC), 2020년 2단계 완전운용능력(FOC), 2021년 3단계 완전임무수행능력(FMC)을 검증한 뒤 2022년 상반기 전작권을 최종 전환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2020년 초 코로나19 대유행에 따라 연합훈련이 연기, 축소되면서 FOC 검증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했다. 그 여파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애석하게도 이번 훈련에서도 FOC 검증은 못하게 돼 전작권 전환 일정은 차질을 빚게 됐다.
남측은 남측대로 사정이 있었고 북측은 북측대로 실망할 이유가 있었다. 톨스토이의 가르침대로라면 지금 남과 북에 필요한 것은 소통이다. 그러나 한미연합훈련 개시와 함께 북은 복원했던 남북 통신선을 다시 닫아버렸다. 마음대로 소통도 할 수 없다. 다시 원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미연합훈련 본훈련 시작 하루 전날인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남북이 통일을 이뤄내면 성장과 번영을 이뤄낼 수 있을 뿐 아니라 동북아 전체 번영에 기여할 수 있다는 ‘한반도 모델’을 강조하고 나섰다. 앞으로도 꾸준히 북측과의 대화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은 것이다.
아울러 군 당국은 8월 15일 뒤늦었지만 다음날 시작되는 한미연합훈련 규모를 축소하고, 병력 실기동훈련을 하지 않는 등 훈련 수준을 ‘로우키’(low-key: 저강도) 기조로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앞서 미 당국도 이번 훈련에 대해 방어적 성격의 훈련이라며 북한에 대해 적대적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문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통일을 이룬 뒤 유럽연합(EU) 선도국이 된 ‘독일 모델’을 거론했다. 그러면서 남북 분단에 대해 “항구적 평화를 가로막는 강고한 장벽”이라면서 “우리도 이 장벽을 걷어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비록 통일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릴지라도 남북이 공존하며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를 통해 동북아 전체 번영에 기여하는 ‘한반도 모델’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힘줘 말했다.

문 대통령 존재 자체가 남북관계 큰 자산
북한의 격앙된 반응은 계속되고 있지만 이렇게 지속적인 설명과 설득으로 한반도의 운명을 스스로 움직여 나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김영철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은 8월 11일 담화를 내고 “남조선 당국이 반전의 기회를 외면하고 10일부터 전쟁 연습을 또다시 하기 시작했다”며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스스로가 얼마나 엄청난 안보 위기에 다가가고 있는가를 시시각각으로 느끼게 해줄 것”이라고 압박했다.
북측 대외선전매체 <통일의 메아리>는 8월 15일 “전쟁연습과 평화는 양립될 수 없다”며 “남조선 군부가 이번 전쟁연습이 ‘방어적’이며 ‘축소’해 진행되는 훈련이라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철면피하게 놀아대고 있지만 자루 속의 송곳은 감출 수 없는 법”이라고 비난을 이어갔다.
이런 와중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한미연합훈련이 실시 중인 8월 22일 이례적으로 주택 건설현장 시찰에 나섰다. 북한 지도부는 통상 한미연합훈련 기간 외부 동선을 최소화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웬일인지 민생행보에 나선 것이다.
김 위원장과 3차례 정상회담으로 각별한 관계를 맺은 문 대통령의 존재 자체가 남북관계 진전에 있어 중요한 자산이다. 그의 남은 임기 8개월에 7000만 한민족의 운명이 걸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까닭이다.

김수한 헤럴드경제 기자
(북한학 박사·한국기자협회 남북통일분과위원회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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