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고닦은 2년… 마침내 기술 자립 성공 “수입처 다변화 넘어 우리가 생태계 다져야”

2021.07.26 최신호 보기
▶실리콘 웨이퍼 위에 포토레지스트를 코팅하는 모습. 웨이퍼를 빠르게 회전시키면 고른 막이 형성된다.

기술 독립 동진쎄미켐 발안공장을 가다
공장 방문 전 보내온 안내 전자우편에 휴대 물품 목록을 적어달라고 돼 있었다. 휴대전화 외엔 원칙적으로 갖고 들어갈 수 없다는 취지였다. 사진 촬영도 어렵다고 난색이었다. 청정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보안시설이라는 점과 함께 빛에 민감한 물질을 제조하는 시설이기 때문이라 했다.
경기도 화성시 동진쎄미켐 발안공장 안내동의 보안 검색대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공장 터가 넓게 펼쳐졌다. 밖에서 볼 때는 평범한 농공단지 시설처럼 보였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현장에서 만난 김재현 부사장은 “전체 부지 면적이 16만 5000㎡를 좀 넘는다”고 말했다.
외벽에 ‘3’이라고 적힌 건물에 들어서자 주유소에 온 듯 화학약품 냄새가 났다. 입구로 진입하면서 맞닥뜨리는 벽에 설치된 스크린을 통해 ‘포토레지스트’(반도체·디스플레이용 감광액) 제조 과정을 동영상으로 볼 수 있었다. 솔벤트, 폴리머(합성수지), 감광제 등 원재료를 정제하고 적정한 비율로 섞어 감광액을 만드는 과정은 물과 감미료를 섞어 음료수를 만들어내는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석유에서 추출된 갖가지 화합물을 정제, 혼합해 제조하는 옅은 주황색의 포토레지스트는 특수 제작된 1갤런(3.8리터)짜리 갈색 유리병에 담겨 삼성전자를 비롯한 반도체 회사에 납품된다. 정제, 혼합은 물론 마지막에 유리병에 담는 과정까지 모두 자동 처리되며 3층에 있는 관제소에서 이를 제어한다.

▶동진쎄미켐 작업자들이 포토레지스트를 담은 특수 유리병을 들고 있다.

▶포토레지스트를 담은 유리병에 상표가 붙여진 모습 | 동진쎄미켐

‘완전 국산화’ 마지막 품목
포토레지스트 제조사로 국내 대표 격인 동진쎄미켐의 발안 사업장 제3공장 준공·가동(2021년 4월)과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 기술을 단기간에 끌어올린 사실 모두 일본의 수출규제 조처가 없었다면 현실로 나타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극자외선 포토레지스트는 ‘고순도 불화수소’(일명 에칭가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디스플레이 소재)와 함께 수출규제 강화 3대 품목이며 2019년 7월 일본의 규제 뒤 2년에 이른 지금도 완전한 의미의 국산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유일한 품목이다.
‘빛’(포토)에 ‘저항하다’(레지스트)라는 뜻을 담고 있는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 기판(실리콘 웨이퍼)에 회로 밑그림을 그리는 데 쓰이며 반도체 첫 공정의 핵심 소재로 꼽힌다. 빛을 받으면 반응하는 성질을 띠어 판화의 음각, 양각처럼 구분되는 모양을 형성할 수 있다. 웨이퍼에 포토레지스트를 회전 방식으로 코팅해 일정한 두께의 막을 형성한 뒤 회로 모양을 새긴 ‘포토 마스크’를 씌우고 빛을 쬐면 웨이퍼에 그 모양대로 패턴이 그려지는 방식이다. 이른바 포토 공정(노광 공정)이다. 이 밑그림에 따라 이어지는 공정에서 반도체 회로가 최종 형성된다.
포토레지스트는 사용하는 빛의 파장에 따라 불화크립톤(KrF·248㎚)용, 불화아르곤(ArF·193㎚)용, 극자외선(13.5㎚)용 등으로 나뉜다. 회로 선폭을 뜻하는 숫자가 작을수록 미세 공정에 유리하다. 일본에서 규제 대상에 포함시킨 전략물자가 바로 극자외선용 포토레지스트이다. 초미세공정에 사용되며 국내에서는 현재 삼성전자에서만 양산에 사용하고 있다.



정부 예산 지원·기업들 밀착 협력
포토레지스트 분야에서 국내에선 독보적인 동진쎄미켐은 지난 2년에 걸쳐 두가지 중요한 성취를 이뤘다. 둘 다 일본 수출규제에 맞대응해 예산을 투입한 국책 사업으로 추진됐다.
하나는 기존 소재보다 성능을 대폭 업그레이드한 불화아르곤 포토레지스트를 개발한 일이다. 오래전부터 거래 관계를 맺었던 SK하이닉스는 물론, 삼성전자에도 업그레이드된 불화아르곤용을 2020년 11월부터 공급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실마리다. 그동안은 일본 업체들에 거의 다 장악돼 있던 분야였다.
김 부사장은 “일본의 규제 당시 내심 걱정되는 바도 있었지만 당연히 기회로도 여겼다”며 “과제 실행에 착수하는 시점에서 곧바로 예산이 나올 정도로 정부 대응과 지원이 빠르게 이뤄졌다”고 말했다. 2019년 9월 개발에 착수해 예상보다 훨씬 빨리 9~10개월 만인 이듬해 6월 개발 작업을 마무리 짓고 그해 11월에 제품화, 상업화 단계에 이른 주요인으로 꼽힌다.
김 부사장은 “고객사(삼성전자·SK하이닉스)에서 시험 작업을 많이 해줘 크게 도움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과거 한번에 2~3개 정도 시험했다면 많게는 20개씩 할 정도로 평가를 많이 해줘 개발 속도를 높이고 좋은 성능의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일본 쪽의 압박으로 비롯된 절실함이 소재 수요자와 공급자를 밀착시켰던 셈이다.
현장 방문 때 같이 만난 동진쎄미켐의 길명군 전무는 “국내 포토레지스트 시장에서 일본 쪽의 점유율은 85% 수준으로 여전히 높지만 동진의 점유율이 규제 이전 6~7%에서 지금은 10%를 웃돌고 있다”고 전했다. 동진쎄미켐 자료를 보면 국내 포토레지스트 시장 규모는 1조 4000억 원 수준이다.



초미세공정 ‘극자외선용’도 개발 진척
또 하나 중요한 성취가 이뤄진 분야는 바로 문제의 극자외선용 포토레지스트 쪽이다. 동진은 소재의 성능 향상에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으며 아울러 안정된 품질을 확보하기 위한 준비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극자외선용 분야에서 완전한 의미의 국산화로 여길 수 있는 제품화, 상업화 단계에 이를 시점은 미정이라고 김 부사장은 전했다. 성능을 좀 더 개선하는 노력과 더불어 “어제 만든 것과 오늘 만든 것이 동일한 성능과 품질을 갖는지” 따위를 반복적으로 시험한 뒤 결정할 것이라고 한다. 아직 개발 중이며 양산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미결 숙제 하나를 안고 있는 셈이다.
국내 소재·부품 업체들이 그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이유로 김 부사장은 일본과 다른 발전 경로를 밟았던 점을 이야기했다. 일본이 기초산업을 발달시켜 위로 차곡차곡 쌓듯 올라가면서 산업을 키웠다면 우리는 거꾸로 위(상위 산업)에서 먼저 산업을 키우고 아래(소재, 부품)로 내려오는 압축성장 방식이었다는 분석이다.
일본의 수출규제 뒤 일본 업체(TOK)나 미국 듀폰이 국내에 투자해 포토레지스트를 생산, 공급함에 따라 숨통을 틔웠지만 국산화 노력은 이어져야 한다고 김 부사장은 말했다. 진정한 의미의 국산화, 자립화는 제품 개발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라 상위 디바이스(제품)에 필요한 소재, 부품을 제때 공급할 수 있는 기술 자립으로까지 연결돼야 하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외국 업체들이 국내에 투자해 공급 병목 현상을 해소했다 해도 언제든 다시 막힐 수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다.
“일본이나 미국 업체가 국내에 진출해 있지만 메인(주류) 개발 사이트는 그들의 본사에 두고 있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기초부터 다지는 작업을 순수 국내 업체가 해야 한다고 본다.”
김 부사장은 “반도체 산업이 발달하는 것을 보고 우리 회사가 반도체 소재 사업에 뛰어들었듯 동진과 같은 포토레지스트 업체가 성장하면 그 원자재를 사업화하려는 국내 업체들이 생겨나고, 이어서 그 업체들에 원료를 공급하는 기초원자재 산업이 연쇄적으로 생겨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기초원재료부터 반도체에 이르는 안정된 공급망이 생겨나 외부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산업 체계는 이런 경로를 통해 형성된다는 설명이었다.

김영배 <한겨레> 선임기자

관련기사

페이지 맨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