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산업유산정보센터’ 내부에 조선인 강제노동 피해로 악명이 높은 하시마(군함도)의 모습이 파노라마 영상으로 전시돼 있다. | 산업유산정보센터
세계유산위원회 결정문 권고 이행 촉구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1940년대 나가사키현 하시마(군함도) 등 일본 산업시설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강제노역에 동원된 사실 등을 이해할 수 있도록 권고한 것을 일본이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데 대해 ‘강한 유감’을 표명했다.
세계유산위원회와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공동조사단이 6월 7~9일 도쿄의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시찰한 결과 일본이 조선인 노동자 등을 데려가 강제노역을 시킨 역사를 제대로 알리라는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를 이행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고 이를 명시한 결정문 초안이 7월 12일 세계유산위원회 누리집에 공개됐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이날 결정문 초안에서 2015년 7월 일본 근대산업시설 23곳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당시 일본 정부에 각 시설의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해석 전략’을 마련하라고 권고하고 이를 충실히 이행할 것을 요구한 2018년 결정문 내용을 재차 언급하며 일본이 “결정을 아직 충실히 이행하지 않은 데 대해 강하게 유감을 표명”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유네스코가 일본이 그동안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 내용과 일본이 지난 약속을 미이행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아주 강하게 유감 표명한 한편 충실한 이행을 촉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외교부, 일본에 적극적 조치 촉구
한일 간에 외교적 다툼이 진행 중인 ‘메이지 시대 산업혁명 유산’이란 메이지 혁명이 발생한 1860년대 말부터 1910년까지 일본이 일으킨 산업혁명의 실태를 보여주는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 등 일본 8개 현에 흩어진 23개 시설을 뜻한다.
이 시설이 양국 간 민감한 외교 문제로 부상한 것은 2014년 1월 일본 정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시도하면서부터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의 2012년 보고서에 따르면 1944년 현재 이 섬 지하에 조성된 해저탄광에서 조선인 노동자 500~800명이 강제노동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일본 시민단체가 발굴한 ‘화장인허가장’은 1925~1945년 섬에서 숨진 조선인이 최소 122명 이상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이에 일본은 2015년 군함도를 비롯한 23개 시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이들 시설에서 “1940년대 한국인 등이 ‘자기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강제로 노역’했음을 인정하고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설치하겠다”고 약속했다. 조선인들이 군함도 탄광 등에서 강제노동으로 큰 고통을 당한 점을 들어 우리나라가 등재에 반대하자 내놓은 타협안이었다. 하지만 2020년 6월 공개된 산업유산정보센터에는 조선인의 강제 노역 사실을 부정하는 내용의 증언과 자료만 전시돼 비판이 쏟아졌다.
이에 따라 세계유산위원회와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공동조사단은 산업유산정보센터 현지 방문 및 온라인 시찰 뒤 60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통해 전체 역사 기술이 불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구체적으로는 ▲1940년대 한국인 등이 강제노역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조처가 불충분하며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전시 등이 부재한 점 ▲국제 모범사례에 비추어 미흡한 점 ▲당사국 간 대화 지속의 필요성 등을 강조했다고 외교부는 전했다. 이에 대해 외교부 관계자는 “강력한 결정문안이 나온 만큼 일본에 적극적으로 조치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일본 “약속 성실히 이행했다” 반발
그러나 세계유산위원회의 이 같은 지적에 대해 일본 정부는 “약속을 성실히 이행해왔다”는 상반된 입장을 밝혔다. 사실상 세계유산위원회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은 7월 13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 유산에 대해 우리나라(일본)는 지금까지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의, 권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우리 정부가 약속한 조치를 포함해 그것을 성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런 입장에 근거해 적절히 대응하겠다”고 덧붙였다.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도 이날 기자회견에서 “성실히 이행하고 있다”며 가토 관방장관과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모테기 외무상은 역사 왜곡 지적을 받는 산업유산정보센터 전시 내용을 변경할 생각은 없느냐는 취지의 질문에 “앞으로 7월 16일부터 31일 사이에 세계유산위에서 다뤄질 것이기 때문에 현시점에선 논평을 삼가겠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일본 정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지적에 대해 “설명이 적절했다”고 반론을 펴는 등 수용 불가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도통신>은 “일본 정부가 반론을 목적으로 7월 16일부터 31일까지 예정된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반도 출신자(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일본 설명은 적절하다는 의견을 표명할 방침”이라고 복수의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7월 17일 보도했다.
<교도통신>은 “위원회가 이미 공개한 결정문 내용을 수정 없이 채택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일본 측 주장은 역사수정주의(과거 침략전쟁에 따른 가해 책임을 외면하는 것)라는 인상을 국제사회에 줄 수 있어 일본 정부로서는 어려운 대응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현재 일본은 세계유산위원회의 21개 위원국에 포함되지 않아 결정문 논의나 채택에 직접 참여할 수 없다. 위원회에서 당사국 의견을 달라는 요구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반론을 펴겠다는 계획이다.
이찬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