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희, ‘from the past-고려 은제주전자 1’,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100×70cm, 2020
솔직히 잘 모르겠다. 머리로는 이해되는데 가슴으론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최근 미술계 안팎에 불어닥친 대체 불가능한 토큰(NFT·Non-Fungible Token) 논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가운데 이론가이며 2017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로도 참여했던 코디최가 NFT로 제작한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어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일찍이 코디최는 이렇게 주장했다. “컴퓨터의 창조성을 인정하는 것이 21세기의 새로운 윤리”라고. 덧붙여 “컴퓨터 세대인 지금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문화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뀔 것이다. 문화의 구조가 바뀌면 행동 양식이 바뀌면서 새로운 규범이 생긴다. 그리고 새로운 규범이 생기면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던 윤리가 생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현재 벌어지는 일을 예견한 통찰이 놀랍다. 코디최의 말처럼 여러 작가가 컴퓨터와 디지털 환경을 적극 받아들이고 있다. 이제 화가들은 모니터를 캔버스 삼고 마우스를 붓처럼 클릭하며 형태와 색을 창조한다. 디지털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가 부지기수다.
이경희도 그런 사례 가운데 한 명이다. 전통적인 평면 페인팅 작업으로 출발했지만 최근 작품은 디지털 환경에 능동적으로 적응한 모습을 보인다. 작품의 주요 소재는 오래된 물건이다. ‘문화재’라는 이름으로 귀하게 보존되는 이 사물은 한반도에 존재했던 고대 왕국의 흔적이며 역사의 기억을 간직한 파편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 유물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품과는 구별된다. 서구 모더니즘 맥락에서 규정되는 예술 작품이 아니란 얘기다. 오래된 무덤에서 출토된 부장품이나 종교적 제례의식에 사용된 기물(器物)은 지금 이 시대에 생각하는 미술 작품이 아니다. 다만 근대 이후 만들어진 제도화된 공간, 즉 박물관 진열장 속에 들어가 전시됨으로써 졸지에 관람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 대목처럼 이경희는 오래된 물건에 깃든 역사성과 그것을 대하는 현대인의 태도와 시각에 주목한다. 이 주제는 이미지를 손쉽게 획득하고 가볍게 소비하는 동시대 이미지 활용 방식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제 누구라도 손쉽게 국내외 박물관 소장품을 볼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게다가 원한다면 품질 좋은 이미지 데이터를 내려받을 수도 있다. 외형상으론 원본과 구별되지 않는 복제 이미지를 아무나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아가 그 이미지 데이터를 조작하고 가공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재창조할 수 있다. 이런 상황 변화에 대한 인식 자체가 이경희 작업의 주요 모티프다.
▶이경희, ‘from the past-백제 금동대향로’,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50×70cm, 2020
팔레트 위 물감처럼 디지털 파일을 섞다
이경희는 온라인에서 얻은 이미지 파일을 가지고 논다. 과거 존재했던 대상을 현재 미의식에 맞추어 재현한다. 인터넷에서 채집한 이미지를 인위적으로 재조합하면서 시공간의 경계를 넘나든다. 비현실적이고 추상에 가까운 결과물은 전통과 현대, 실재와 허구, 가상과 현실이 공존하는 동시대성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12세기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은제 금도금 주자와 받침’(미국 보스턴미술관 소장)을 모티프로 삼은 ‘from the fast’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은제(銀製) 공예품으로서 기능과 상관없이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부각시킨 이 작품은 아날로그 회화 방식으론 표현할 수 없는 디지털 감성의 인공미를 보여준다. 0과 1 조합으로 이루어진 이진법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와 음과 양이라는 동양의 세계관을 담고 있다.
한편 물감이 덧칠해진 일반적인 회화작품처럼 보이지만 실제 작품 표면은 두께가 없이 평평하고 매끄럽다. 디지털 방식으로 출력됐기 때문이다. 두텁게 쌓인 물감 층과 붓질 흔적은 전통적인 캔버스 회화가 간직한 고유한 특성이다. 다시 말해 모더니즘 미술이 고수하고자 했던 작품의 본질, 즉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는 유일무이한 원본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그런데 이경희는 모더니즘 회화가 지닌 이런 한계와 특성을 의도적으로 거부한다. 게다가 디지털 파일을 토대로 여러 장 중첩이 가능한 출력물로 제작함으로써 회화의 원본성도 붕괴시킨다. 이른바 ‘기술복제시대’ 예술작품이 처한 운명에 적극 호응하고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실천하고자 한다.
▶이경희, ‘from the past-신라 토우’,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40×20cm, 2019
디지털 테크놀로지라는 실험 도구
예술은 시대에 따라 특정한 도구를 활용하는 정신 활동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때 무엇보다 환경 변화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예술가의 태도가 중요하다. 이경희는 “복잡한 조형 과정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결합된 시간’을 표현하고 재해석하고자 한다. 세상이 변하는 흐름에 발맞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오늘의 이미지를 창조하고 싶다”고 말한다.
과학자의 상상력은 세상을 향한 궁금증과 의심에서 출발한다. 궁금증과 의심은 호기심의 다른 이름. 과학자의 호기심은 가설로 구체화되고 실험을 통해 증명되고 학설로 인정받는다. 마찬가지로 예술가의 상상력은 창작이라는 실험 과정을 거쳐 작품으로 구현되고 완성된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라는 실험 도구를 적극 활용한 이경희의 작업도 과학자의 연구 과정과 다르지 않다. 전통의 현대적 재해석이라는 시대정신과 적절한 형식 실험이 어우러진 이경희의 작품은 상상력으로 증명된 예술가의 가설이다.
이준희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_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