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할 수 있다는 것

2021.07.19 최신호 보기
▶윤진서 씨와 뭉치(왼쪽), 팔월이│윤진서

팔월이는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저 멀리서부터 이곳으로 다가오는 태풍 소리가 들리는 걸까?
태풍이 오기 3일 전부터는 식욕을 잃고 분주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냄새를 맡는다. 여러 곤충의 동향을 살피고 집으로 들어오면 창밖 너머 정원을, 나무 사이를, 해가 없는 하늘을 한없이 바라본다.
팔월이는 무얼 예감한 걸까? 뉴스를 보고 아는 것도 아닐 텐데 어쩌면 태풍이 오는 소리를 듣고 있는 걸까? 인터넷으로 ‘강아지 청력’ ‘강아지 후각’ 따위를 검색하며 팔월이가 느끼고 있을 만한 것들의 단서를 찾아본다. 태어난 지 두 달이 됐을 때 내게로 와서 나의 반려견이 된 팔월이는 이제 열두 살이 됐다. 사람 나이로는 82세 정도라고 인터넷은 말한다. 그런 떠다니는 소리를 믿지 않고 난 팔월이가 건강하다고 믿어왔다.
그렇지만 그런 나의 바람과는 아랑곳없이 작년부터 이가 빠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에도 내가 이를 잘 닦아주지 않아서 그러나 하고 책망했을 뿐 팔월이가 늙어간다고 인정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늙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올해부터는 좋아하던 껌도 입에 물지를 않고 물렁물렁한 음식만 찾았다. 그뿐만 아니라 잠자는 시간도 점점 늘었고 간식 찾기 놀이도 예전처럼 의욕을 갖고 임하지 않는다. 4년 전 이맘때 팔월이에게 심한 우울증이 오기도 했다. 제주도에 와서 마냥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친구 하나 없는 적막한 이곳에서 내가 육지로 촬영을 가거나 남편이 출근하면 긴 시간 정원에 홀로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 녀석 나름대로 집을 지킨다고 긴장했고 서울에선 못 봤던 들개나 노루가 가끔씩 찾아오면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내가 몇 달 만에 집으로 돌아오면 일주일씩 곁을 주지 않기도 했다가 조금씩 마음이 풀리면 다시 옆으로 와 잠을 청했다.
팔월이의 우울감을 보다 못한 나는 뭉치를 데려왔다. 이곳저곳 찾아보고 팔월이보다 작고 성별이 달라 서로 적대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큰 아이를 데려온 것이다. 다행히 그 둘은 사람 식구가 집에 없을 땐 서로 의지하며 지냈다. 팔월이는 이제 나뿐 아니라 뭉치에게도 크나큰 의미일 것이다.
그런 우리의 팔월이가 노견이라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느 날은 꿈속에서 팔월이, 뭉치와 숲속을 산책하는데 큰 곰이 내게 다가오려는 걸 팔월이가 물리쳤다. 피 흘리는 팔월이를 데려와 고기 죽을 먹였지만 일어나지 못하고 침대에서 앓고 있었다. 나는 슬피 울다 잠에서 깼다. 꿈을 깨고 보니 팔월이는 아직 자고 있었다. 여전히 내 침대 옆에서 자고 있다. 팔월이는 나와 12년을 함께 살며 많은 곰을 물리쳐준 것이나 진배없었다.
내년이면 만 39세가 되는 나에게 죽음이란 단어가 일상을 스치기 시작했다. 평생 같이 있을 것만 같았던 가족이나 사랑하는 존재가 죽음 속으로 사라지고 어쩌면 미래와 과거 딱 중간에서 앞으로 감기, 뒤로 감기를 반복하며 현재를 살아낸다. 가끔 추억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멀고 먼 미래를 버틸 힘을 얻는 것이다.
태풍이 도착하지 않아 아직은 별 보며 마당에 누워 있기 좋다. 어느새 옆에 온 팔월이가 꾸벅꾸벅 졸다 나를 바라본다. 아직은 우리가 함께하고 있다. 그리고 밤하늘엔 별이 참 많다.

윤진서 배우_ 2003년 영화 <올드보이>로 데뷔 후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으며, 책 <비브르 사비> 등을 썼다. 최근 유튜브 채널 ‘어거스트 진’을 개설했다. 자연 친화적인 삶을 지향하며 제주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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