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정상회담을 마친 문재인 대통령이 5월 21일 오후(현지시간) 워싱턴 6·25전쟁 참전기념비 공원에서 열린 6·25전쟁 전사자 추모의 벽 착공식에서 참석자들의 시삽을 지켜보고 있다.│연합
미 6·25전쟁 전사자 ‘추모의 벽’ 착공 의미
“참전용사의 피와 땀, 우애와 헌신으로 태동한 한미동맹은 사람과 사람, 가치와 가치로 강하게 결속되며 발전했습니다. 미국과 한국은 고통스러운 역사도 영광스러운 순간도 항상 함께했습니다. 앞으로도 동맹의 힘이 필요한 순간마다 한국은 변함없이 미국과 함께할 것입니다.”
미국을 방문해 한미 정상회담을 한 문재인 대통령이 정상회담이 끝난 뒤인 5월 21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내셔널몰에 있는 6·25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에서 열린 ‘미국인 6·25전쟁 전사자 추모의 벽’ 착공식에 참석했다. 문 대통령은 “전쟁과 전후 재건이라는 가장 힘들었던 고비에 참전용사들이 있었다”며 “대한민국은 참전용사들의 희생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계속 증명해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문 대통령은 앞서 2018년 유엔(UN) 참전용사들에게 ‘추모의 벽’ 건립을 약속했다. 문 대통령은 “그 약속을 지키게 돼 감회가 매우 깊다. 2022년 우리 앞에 설 추모의 벽에서 미국과 한국의 미래세대들이 평범하고도 위대한 이름들을 만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추모의 벽 건립법 통과 5년 만에 첫 삽
추모의 벽은 기념공원 안에 추모 연못(기억의 못)을 중심으로 그 둘레에 경사가 있는 벽(높이 1m, 둘레 50m)을 화강암 소재로 설치하는 형태로 만들어진다. 벽면에는 6·25전쟁 전사자 미군 3만 6595명 및 미군에 배속됐던 카투사(한국군지원단) 전사자 7174명 등 총 4만 3769명의 이름이 일일이 새겨지고 유엔 참전국 수와 부상자 수도 각인된다.
이날 착공식에는 문 대통령 외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 황기철 국가보훈처장, 이수혁 주미 한국대사, 래리 호건 메릴랜드 주지사 부부, 존 틸럴리 6·25전쟁 참전용사 추모재단(KWVMF) 이사장(전 주한미군사령관), 손경준 6·25전쟁 참전유공자회 회장 등이 참석했다. 문 대통령은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과 함께 명판을 가리고 있던 현수막을 걷어냈다.
문 대통령은 “오늘 우리가 첫 삽을 뜨는 추모의 벽에 4만 3769명의 이름이 새겨진다. 우리는 영웅들의 용기와 헌신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워싱턴에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비, 6·25전쟁 참전비, 베트남전 참전비 등이 있는데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참전비와 달리 6·25전쟁 참전비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전사자 명단이 새겨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번 추모의 벽은 미 의회에서 ‘추모의 벽 건립법’이 통과된 지 5년 만에 첫 삽을 뜨게 됐다. 완공은 2022년 봄으로 예상된다. 추모의 벽 건립사업은 2016년 10월 미국의 6·25전쟁 참전용사 추모재단과 우리 교민들이 발의한 추모의 벽 건립법이 미국 상원에서 통과되면서 시작돼 그동안 양국의 노력과 각계의 지원으로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됐다.
앞서 이 법안은 2015년 봄에 6·25전쟁 참전용사인 샘 존슨 하원 의원(공화당·텍사스)이 발의하고 또 다른 참전용사인 찰스 랭글(민주당·뉴욕), 존 코니어스(민주당·미시건) 하원 의원이 공동발의자로 서명해 시작됐다. 법안은 미국 전쟁기념물 관리위원회가 6·25전쟁 참전용사 추모재단으로부터 추모벽 설계를 제출 받아 검토하고 민간 기부를 허용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번 건립사업 예산은 274억여 원으로 국비 266억 원, 한국 재향군인회 모금액 6억 3000만 원을 포함한 성금 8억 원으로 충당됐다. 이번 추모의 벽은 국가보훈처가 추진 중인 유엔 참전기념시설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정부는 이 사업 예산의 대부분을 부담하면서 건립을 지원했다.
▶미군 6·25전쟁전사자 ‘추모의 벽’ 조감도│ 국가보훈처
정부 설계·공사비 지원하며 공사 시작
미 하원에서 건립법이 통과된 직후인 2016년 우리 국회에서도 건립 지원 촉구 결의안이 통과됐다. 하지만 건립 자금 조달 문제로 몇 년간 착공이 미뤄졌다. 미연방 기념사업법에 따르면 건립에 소요되는 총 사업비 중 85%를 사전 모금해야 건축허가를 받을 수 있다.
재향군인회가 건립 성금 모금활동에 나서면서 삼성전자 등 일반 기업과 단체도 참여했고 정부에서도 당시 정경두 국방부 장관과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 등이 모금에 동참했다. 군에서도 합참의장을 비롯해 각 군의 간부가 온정을 보탰다.
문 대통령이 추모의 벽 건립 지원 의사를 처음 언급한 건 2018년 6월 부산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해서다. 당시 문 대통령은 “6·25전쟁은 잊혀진 전쟁이 아니다. 참전에 대한 자부심을 높이겠다. 워싱턴 6·25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 안에 추모의 벽 건립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추모의 벽 건립을 위해 워싱턴에 실사단을 파견하고 국가보훈처가 6·25전쟁 참전용사 추모재단과 실무 협의를 했다. 그사이 추모의 벽 설계를 맡을 건축사로 하트만 칵스가 선정됐다. 이어 문 대통령은 2020년 6월 제65주년 현충일 추념사에서 “추모의 벽을 2022년까지 건립하겠다”고 공식화했다. 이에 따라 정부가 2021년 3월 설계비와 공사비를 지원하면서 건립 공사가 시작됐다.
착공식이 열린 6·25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은 미국 연방정부에서 직접 관리하는 미국 내 대표 6·25전쟁 참전 기념시설로 공원에는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 19명이 전투대형으로 행군하는 동상(19인 용사상)이 세워져 있다. 특히 6·25전쟁 참전용사로 19인 용사상 실존 인물 중 한 명인 윌리엄 빌 웨버(96) 퇴역 대령(전 6·25전쟁 참전용사 추모재단 이사장)도 착공식에 참석했다. 빌 웨버 대령은 “고령의 참전용사들이 세상을 떠나도 그 자리에 남아 6·25전쟁 역사를 전하는 것이 추모의 벽”이라고 말했다.
6·25전쟁 때 오른쪽 팔과 다리를 잃은 빌 웨버 대령은 미 상원에서 법안이 통과되기 전인 2015년 11월 한국 특파원을 만나 “이제 곧 90세다. 추모의 벽을 보지 않고는 세상을 뜨기 싫다”며 추모의 벽이 마지막 필생의 과업이라고 했다. 한편 존 틸럴리 6·25전쟁 참전용사 추모재단 이사장은 추모의 벽을 두고 “카투사의 이름이 새겨지는 기념비는 미국 최초”라고 말했다.
국가보훈처 이용기 현충시설과장은 “추모의 벽은 6·25전쟁에서 헌신한 참전용사에게 감사드리고 한미 간 우호 협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며 “71년 전의 헌신을 담은 조형물 건립으로 한미동맹의 굳건함을 재확인하고 한반도 긴장 완화와 항구적 평화를 위한 한미 간 공조를 확인하는 계기가 마련됐다. 평화의 기념탑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한편 추모의 벽 착공식이 열리기 직전에 백악관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문 대통령과 함께한 자리에서 6·25전쟁 노병인 랠프 퍼켓 주니어(94) 예비역 대령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한국 국민은 (이들의 희생을) 잊지 않았다. 그 증거로 여기 이 자리에 한국 대통령이 함께 있다”고 말했다. 백악관은 미국 정부의 명예훈장 수여식에 외국 정상이 함께한 것은 문 대통령이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미군 6·25전쟁전사자 ‘추모의 벽’ 조감도│ 국가보훈처
“참전용사에 감사” 보훈외교 펼쳐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은 이번 한미 정상회담과 연계해 6·25전쟁에 참전한 미국 참전용사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는 국제보훈외교를 펼쳤다. 황 처장은 5월 20일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에 있는 미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해 앤드루 필립 학교장과 면담에서 “6·25전쟁 당시 미국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헌신, 해군함정과 무기 지원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자유를 수호할 수 있었고 이제는 세계 경제 강국으로 성장해 어려운 나라를 도울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6·25전쟁 당시 무기 지원이 이뤄지도록 교량 역할을 한 사람은 미 해군사관학교 출신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마이클 루시 대령(전 한국해군사령관 겸 한국해군고문단장)이다.
황 처장은 이어 5월 21일 메릴랜드 주지사 관저에서 래리 호건 주지사와 부인 유미 호건 여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미국 참전용사 샘 필더에게 ‘리멤버 유(REMEMBER YOU)’ 명패를 수여했다. 이 명패는 유엔 참전용사에게 경의를 표하고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국가보훈처가 제작했다.
첫 번째 수여자로 샘 필더가 선정됐다. 그는 1951년부터 1954년까지 6·25전쟁 당시 해병대소속 포병으로 참전했으며 현재까지 참전용사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샘 필더는 “아직도 그 당시 폐허가 된 상황을 잊을 수 없고 대한민국의 자유와 눈부신 경제성장의 기초를 다지는 데 밑거름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계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