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대원, ‘자화상-눈물’, 광목천, 한지, 아크릴릭, 토분, 아교, 커피, 148×102cm, 2011
자연은 경이롭고 세상은 복잡하다. 그 틈바구니에 사는 인간의 삶 역시 각양각색, 천차만별. 뒤죽박죽 엉킨 실타래 같다. 아마도 미시 세계를 연구하는 양자역학이나 광활한 밤하늘을 바라보는 천문학자들이 관측하는 우주도 다르지 않을 게다. 공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조직한 세계를 ‘사회’라 일컫는다. 사회는 얼핏 혼돈(카오스)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름의 질서와 원칙으로 촘촘히 연결돼 있다.
그럼에도 사회는 곧게 뻗은 레일 위를 굴러가는 열차처럼 항상 매끄럽게 움직이는 건 아니다. 난데없이 세모, 네모 모양 바퀴도 더러 끼어 있기 때문이다. 갈등, 대립, 경쟁, 모순, 전쟁, 폭력, 혐오 같은 부정 요인은 이렇게 생긴 바퀴 때문에 발생하는 덜컹거림이다. 다행히 인간은 모난 부분을 깎고 다듬을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지녔다. 타협, 조율, 양보, 배려, 존중, 관용, 봉사 같은 긍정의 영향력은 여기서 나온다. 그 힘은 사회를 조금이라도 더 좋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어쩌다 보니 장광설을 늘어놨다. 하여간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다. 세상은 복잡다단하다. 그 속에 사는 인간 삶 역시 다양하다. 이 가운데 예술가는 특별한 감수성을 지닌 독특한 존재다. 예술가는 자기만의 표현 방식으로 세상사에 은밀히 반응한다. 정치가들처럼 대놓고 큰소리로 떠벌이지 않는다. 예술가의 잔잔한 발언은 사회에 묵직한 울림으로 영향력을 끼친다. 좋은 예술가일수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 없이 말한다.
▶양대원, ‘왕의 집’, 광목천 위에 한지, 아크릴릭, 토분, 아교, 커피, 148×105cm, 2018
▶양대원, ‘왕의 책’, 광목천 위에 한지, 아크릴릭, 토분, 아교, 커피, 148×105cm, 2018
많은 노동력이 반영된 ‘만들어진 그림’
어떤 분야에서든 일가를 이룬 사람의 과거는 남다른 구석이 있다. 작가 양대원도 그런 경우다. 양대원은 화학과를 졸업했다. 가끔 회화과 졸업이라는 정보도 있는데 이건 화학과의 오기다.
아무튼 양대원은 미대 진학을 탐탁지 않아 하셨던 부모님 뜻에 따라 일단 화학과에 진학했지만 대학에 입학해선 전공인 화학(化學)은 내팽겨 치고 혼자서 원 없이 맘껏 그림을 그렸다. 축제 기간에 빈 강의실에서 혼자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동음이의어로 화학(畵學)을 전공하긴 한 셈이다. 결국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지금까지 전업 작가로 살고 있다.
이런 이력 못지않게 작품 제작 기법도 다른 화가들처럼 평범하지 않다.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는 일반적인 그리기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만든다’는 표현이 더 적확하다. 섬세함과 치밀함, 그리고 엄청난 노동력이 반영된 ‘만들어진 그림’이다.
과정을 정리하면 이렇다. 먼저 한지(韓紙) 여러 장을 배접해 두툼하게 만든다 → 한쪽 (뒤)면에 면(綿) 천을 덧대서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 반대쪽 (앞)면에 토분(土粉)과 커피를 칠한 후 깨끗한 천으로 닦아낸다 → 그 위에 다시 콩기름을 바르고 닦아낸다 → 이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한다 → 비로소 그 위에 미리 구상하고 스케치한 밑그림을 옮겨 그린다 → 이때 밑그림을 따라서 뾰족한 송곳으로 힘껏 눌러서 선이 옴폭 패게 한다 → 옴폭하게 눌린 선 자국에 다시 토분을 발라 홈을 메우고 닦아 내기를 여러 차례 반복한다. 고려청자에서 볼 수 있는 상감(象嵌)기법을 생각하면 된다.
완성된 작품에서 보이는 선(線)이 예리하고 선명하게 드러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색 역시 이런 식으로 칠해졌다. 물감을 한 번에 두툼하게 칠해 검은색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묽게 탄 물감을 얇게 바르고 물기가 마르면 다시 덧칠하기를 수십 번 반복해서 조금씩 쌓았다. 칠흑같이 짙고 깊은 검은색은 이렇게 구현된다.
번거로운 제작 과정에 비해 이미지는 간결하다. 색도 절제됐고 구성도 심플하다.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는 원(圓), 동그라미다. 컴퍼스로 그린 동그라미를 변형해서 다채로운 형상을 만든다. 인간이나 눈물을 상징하는 기호가 그것이다.
또 다른 대표 시리즈는 글씨 그림, 일종의 문자도(文字圖)다. 조형적 완성도 못지않게 암호를 해독하듯 뜻을 밝혀내면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예컨대 ‘인생’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보면 한글 자음과 모음 ‘ㅇ, ㅣ, ㄴ, ㅅ, ㅐ, ㅇ’이 절묘하게 조합돼 있다. 이 밖에도 ‘책’ ‘생각’ ‘죽음’ ‘돈’ ‘숲’ ‘집’ ‘방’ ‘생로병사’ ‘눈물’ ‘서러움’… 같은 글씨 그림이 있다. 이런 시리즈는 한글뿐 아니라 한자나 알파벳으로도 표현한다. 대부분 제목을 실마리 삼아 그림 글씨의 뜻을 읽어 내지만 난도가 높은 경우도 간혹 있다. 그래서 더 흥미롭다.
▶양대원, ‘인생’ 액자, 광목천 위에 한지, 아크릴릭, 토분, 아교, 커피, 64.5×56.8cm, 2020
은둔 예술가가 사회에 발언하는 방식
양대원 작가의 작품은 두 갈래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자기 존재에 대한 사유에서 나온 일련의 ‘자화상’ 시리즈, 또 다른 하는 타인과 역사, 사회라는 외부의 세계에 반응한 결과물이 그것이다. 특히 후자에 해당하는 작품은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과 존재 이유를 새삼 생각게 한다. 최근 작품은 평면을 넘어 입체와 설치까지 형식이 확장됐다. 골동품 시장에서 구입한 액자와 온갖 오래된 물건을 활용해 만든 오브제 작품은 평면 못지않게 매력적이다.
대하소설 〈태백산맥〉 저자 조정래는 스스로 만든 글 감옥에 갇혀 소설 속 인물과 사건을 만들고 이야기를 토해냈다고 한다. 양대원도 자발적 고립을 선택했다. 번잡한 세상 한복판과 거리를 두고 오직 작업에만 매진한다. 그럼에도 사회를 해석하고 분석하는 안테나는 예민하게 작동한다. 은밀하고 치밀한 이미지로 발언하는 양대원의 메시지는 시공간을 초월한 진실의 파동이다.
이준희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_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