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불쾌하게 만드는 감정은 몇 가지 안 된다. 정리해보면 우울과 불안, 혐오와 분노, 외로움과 공허. 이게 전부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렇다. 환자들의 사연을 듣고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각자의 사연은 다양해도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이 여섯 가지로 정리된다.
환자의 고통을 없애주는 게 의사가 하는 일이니 괴로운 감정을 느끼지 않게 해주는 게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당연한 역할이라고 여기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적어도 마음이 덜 아프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겠지만 이게 해답은 아니다.
열이 나는 것은 우리 몸의 자기보호 기능이니 무조건 진통해열제를 먹고 체온을 떨어뜨리면 오히려 해롭다. 불쾌한 감정을 느끼는 건 마음에서 열이 나는 것이다. 감정이 끓어오른다고 무턱대고 억눌러선 안 된다.
“그렇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게 먼저다. “아이, 짜증 나!”라고 소리치기 전에 “시험을 못 봐서 내가 지금 우울하구나”라고 자기감정을 정확히 읽는 게 먼저다. 제대로 알면 불쾌감도 내 편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 “우울하면 안 돼!”라고 외면하지 말고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아서 우울한 거구나. 이럴 때 우울한 건 자연스러운 거야” 하고 자기 마음을 인정해주는 게 그 다음에 할 일이다. 내가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남들이 아무리 “괜찮아, 힘내!”라고 응원해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울한 감정은 내가 어떻게 행동하길 바랄까?” 하고 호기심을 가지면 좋겠다. 불쾌한 감정은 가치 지향적인 행동을 하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우울한 건 싫어. 빨리 기분 좋아지고 싶어!”라고 조급해하면 안 된다. 술이나 도박처럼 즉각적인 쾌감을 주는 것들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게 된다.
우울이라는 감정의 숨은 뜻은 “나에게 잠시 실망했지만 다음번에는 더 나아지도록 힘을 내자!”이거나 “비록 결과는 안 좋지만 최선을 다한 나를 응원해주자!”일 것이다. 불쾌한 감정과 친하게 지내는 건 까칠하게 굴지만 자신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친구를 사귀는 일이다.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도 여전히 우울해요!” 이런 항의도 종종 듣는다. 세상에는 내가 알려준 것보다 더 훌륭한 기법들이 많으니까 쉽게 포기하지 말고 감정과 친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더 좋은 방법을 찾아보자.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 감정의 속성이란 점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감정은 계절이다. 따뜻한 봄이 지나 등골 서늘해지는 겨울이 반드시 찾아오는 것처럼 감정도 계절처럼 변한다. 추운 게 싫다고 겨울을 몰아낼 수 없듯 아무리 발버둥 쳐도 우울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을 비난할 수 없는 것처럼 우울은 나쁜 게 아니다. 초록이 물든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해야겠지만 어느 순간 나뭇잎은 누렇게 시들 것이다. 서글프지만 우리 마음도 언제나 봄일 수는 없다.
김병수 의사_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자 몇 권의 책을 쓴 저자. 서울아산병원에서 근무했고, 지금은 교대역 작은 의원에서 사람들의 상처 난 마음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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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