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어떤 집의 입구에서 찍은 해 질 녘 풍경│윤진서
스물세 살 되던 해, 서울 목동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던 나는 처음으로 서울을 벗어나 경기 고양시 행신동으로 이사했다. 끝을 모르고 올라가기만 하던 목동의 집값도 견디기 힘들었고 같은 소속사에서 여러 조언을 해주던 한 선배 배우의 추천으로 오게 됐다. 아파트도 있지만 산도 있고 비교적 낮은 건물이 많은 데다 집값도 서울에 비해선 여유로워 숨통이 트이는 곳이었다.
조용하게 동산에 싸인 듯 옴폭 들어간 이곳은 약간은 시골 같은 구석도 있는 것이 어머니들의 따뜻함이 유독 느껴지는 동네였다. 대단지 아파트,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모여 있는 학교에서 매번 중간 이하 성적을 받으면서 살아온 나는 점점 교과서보다 소설책을 읽거나 영화를 봤고 밤이면 몰래 잠을 자는 척하며 이불 속에서 책을 보곤 했다. 엄마는 그것마저도 언제부턴가는 포기했는지 “그래. 그것도 글씨니까 그거라도 읽어라”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경쟁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는 척했지만 사실은 경쟁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밀려나듯 행신동으로 온 지도 벌써 17년이 됐고 6년 전엔 바닷사람이 되고 싶다며 제주로 떠나 곶자왈 초입에 집이라고는 6채가 다인 곳에 자리를 잡고 살아왔다.
점점 더 깊은 곳으로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무렵, 새롭게 드라마 촬영이 시작돼 얼마 전 다시 행신동으로 돌아왔다. 비어 있던 집은 생기를 찾았고 시골 같았던 행신동은 6년 새 여느 서울 동네처럼 영화관이나 패스트푸드점이 즐비한 동네가 돼 있었다. 오늘 아침은 슬리퍼를 신고 나가 스타벅스로 가서 디카페인 커피와 에그 샌드위치를 먹고 조조로 영화 <미나리>를 봤다. 제주에 살며 로망처럼 말하던 하루였다.
척박한 땅에 농사를 짓는 것처럼 도전을 일삼던 20대, 행신동은 간간이 엄마와 주말 농사를 짓게 해준, 마음의 버팀목이 돼준 공간이었다. <미나리>를 보고 나와 영화관 측이 제공한 쿠폰에 도장을 찍어달라고 했다. 영화를 5번 보면 1회를 공짜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식이었는데 도장을 찍은 뒤 사은품으로 지리산 공기가 담긴 통을 받았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정말 공기를 파는구나.’
나는 촬영이 끝나면 다시 제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정원 정자에 앉아 여름에 핀 수국을 바라보며 수박 한 입 베어 물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바람을 기다리던 여름. 40년 가까이 살며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다. ‘이제 내 일터로 돌아올 시간이구나.’ 불현듯 다시 돌아갈 촬영장의 냄새가 스친다. ‘그래 어쩌면 공기를 사서 마실 수도 있겠군.’ 정자 앞 백일홍이 붉게 물들던 제주의 여름이 벌써 그립다.
윤진서 배우_ 2003년 영화 <올드보이>로 데뷔 후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으며, 책 <비브르 사비> 등을 썼다. 최근 유튜브 채널 ‘어거스트 진’을 개설했다. 자연 친화적인 삶을 지향하며 제주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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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