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유산을 노래하는 퓨전국악밴드 ‘비단’의 공연 모습
퓨전국악밴드 ‘비단’
“너른 대지를 달려서 내 가슴에 이 세상을 담으리 / 푸른 하늘을 달려서 내 발아래 이 세상을 두리라.”
시원한 판소리 보컬에 가야금·대금·해금, 타악이 더해져 흥을 돋운다. 국내 한 퓨전국악밴드가 부른 ‘출사표’라는 곡의 일부다. 흥미롭게도 가사 속 화자는 ‘훈민정음’이다. 조선시대 새로운 문자로서 세상을 개혁하겠다는 훈민정음의 각오를 1인칭 시점으로 표현한 곡이다.
이 특별한 음악의 주인공은 국악인 5명으로 이뤄진 퓨전국악밴드 ‘비단’이다. 이 밴드 이름에는 ‘한국의 문화유산을 노래한다’는 표어가 붙는다. 예로부터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나 외교사절단 등에게 임금이 하사한 귀한 옷감으로 알려져 있던 비단. 밴드 비단은 금 못지않게 귀중하게 여겨졌던 비단 옷감처럼 가치 있는 우리 문화유산 콘텐츠를 창작국악으로 소개하고 있다. “우리 문화유산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가치가 있지만 대부분 깊은 산속이나 박물관에 가야만 접할 수 있죠. 문화유산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알리자는 뜻으로 문화유산을 주제로 한 창작국악을 하고 있습니다.” 보컬을 담당한 김수민은 비단의 음악을 이렇게 소개한다.
비단이 2014년부터 지금까지 발표한 앨범에는 훈민정음부터 한식, 한옥, 춘향전, 이순신 장군, 조선의 궁, 제주 해녀 등 다양한 문화유산을 소재로 한 음악들이 담겼다. 각각 ‘출사표’는 훈민정음을, ‘만월의 기적’은 조선백자를, ‘달’은 <심청전>을 소재로 한다. 모두 우리 고유문화를 알리겠다는 특별한 취지가 돋보인다.
▶퓨전국악밴드 ‘비단’의 보컬 김수민│케이앤아츠
아홉 개 언어로 이뤄진 문화유산 다큐 공연 주목
“국악인 듯 가요인 듯 참신합니다. 듣고 나니 도깨비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요.”
“국악은 따분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잘못 생각했네. 아이돌 노래 듣다가 국악까지 넘어왔네요.”
비단의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댓글을 보면 ‘한국 고유문화를 알려주는데 고루하지 않다’는 반응들이 많다. 특히 음악과 함께 소개되는 역사 다큐멘터리 등은 문화유산에 대한 정보와 역사적 맥락을 알려주는 등 교육적 의미도 크다.
이 밴드의 음악을 즐겨 듣는 팬은 청소년부터 중장년까지 매우 다양하다. 최근엔 10대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특히 효의 가치를 담은 <심청전>을 소재로 한 음악 ‘달’은 학교 교실에서도 교육 목적으로 많이 활용한다.
음악 세계만큼 이들의 특별한 공연도 주목거리다. 비단의 음악은 전통 판소리를 전공한 소리꾼의 노래와 해금·대금·가야금, 타악(모듬북, 꽹과리, 운라, 정주 등) 등 다양한 국악기 소리로 구성된다. 특히 일반 국악공연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운라, 정주 등 전통악기의 매력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비단의 공연을 본 이들은 “노래가 좋아서 공연 보러 왔는데 역사를 배우고 간다”는 반응을 보이곤 한다. ‘문화유산 미디어 국악공연’이란 콘셉트로 진행하는 이들의 공연은 문화유산 다큐멘터리 상영과 더불어 퓨전국악 공연을 감상하는 식으로 꾸려진다. 다큐멘터리는 관객들의 다양한 국적에 맞춰 총 9개 언어로 제공된다. 비단 소속사인 사회적기업 케이앤아츠 김기범 대표는 “아무 설명 없이 음악만 듣는 것보다 어떤 유래와 배경에서 그 음악이 시작된 것인지 관련 정보를 알고 들으면 이해의 폭이 훨씬 넓어진다”고 말한다. “공연을 보고 역사를 제대로 알게 됐다고 해주는 관객들을 볼 때 가장 뿌듯합니다.”
이런 방식의 공연은 청소년을 비롯해 시각장애인, 다문화가정 등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맞춤형으로 진행한다.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세종과 지화, 춤을 추다’ 공연에선 실제 시각장애인 무용팀의 춤이 더해져 관객들의 공감을 배가시켰다. 다문화가정을 대상으로 한 ‘국악공연으로 배우는 한국살이’ 공연에선 10년 차 이상 선배 이민자의 해설을 곁들인다. “‘비단결’이라는 말이 있죠. 저희 그룹 이름인 ‘비단’에는 고운 비단결 같은 마음으로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자는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가 만든 문화 콘텐츠를 사회 다양한 이웃이 함께 즐기고 나눌 수 있게 하자는 사회공헌의 의미로 특별한 공연도 진행하고 있죠.” 김수민의 설명이다.
음악 선정과 영상 기획 등을 할 때 비단만의 기준도 분명히 있다. 우선 특정 문화유산이 어떤 방식으로든 현재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먼저 판단한다. 다큐멘터리 영상은 아홉 개의 언어로 소개하기 때문에 외국인들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고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이야기인지 살핀다. 노래 가사는 최대한 은유·함축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주제를 지나치게 직접적으로 전달하려다 계몽적이거나 촌스러운 음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화유산·독립운동가 소재 음악 등도 준비
퓨전국악밴드로 활동하는 비단 입장에서도 최근 국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반가운 일이다. 그간 국악에 대해 ‘전문가들의 음악’ ‘낯선 분야’라는 세간의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수민은 “경험의 부재 탓도 컸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마트에서 음식을 사도 시식코너에서 맛을 보고 사잖아요. 그런데 국악에 대해선 이미 어렵다는 인식이 형성돼 있어서 그 맛을 볼 생각을 못했던 거죠. 최근 실용음악, 댄스 등 다양한 요소를 결합해 국악을 대중화하는 시도를 많이 하는데요. 대중의 눈에 높아 보였던 국악의 벽을 조금씩 허무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단 자칫 전통이 빠진 일반 대중음악으로 변형하는 일은 조금 주의할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 김 대표는 “미디어에서 국악이 종종 ‘기존 가요를 국악 창법으로 불렀다’ 또는 ‘국악인인데 가요도 잘 부른다’는 수준에서 소비되기도 하는 상황에서 최근 국악 창작곡들이 주목받는 현상은 의미가 있다”며 “기존 가요 등을 국악과 접목해 부르는 시도나 카피곡(다른 음악가의 곡을 재해석한 곡) 등도 의미 있겠지만 저희처럼 순수 창작곡으로 문화유산의 가치를 알리는 시도가 있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비단은 2020년부터 경주 첨성대, 통영 이순신공원의 거북선 등 문화유산 현장을 직접 찾아 뮤직비디오를 찍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이 뮤직비디오는 3월부터 격주로 비단 유튜브 채널에 하나씩 공개되고 있다. 2021년엔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음악도 준비 중이다. 장기적으로는 주변국의 동북아 문화공정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나라와 독도를 소재로 한 문화 콘텐츠를 만드는 등 문화 주권을 지키기 위한 활동도 추진할 계획이다.
김청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