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15분간 싸운 브이와 범수가 머리를 밀치며 상대방을 노러보고 있다.
▶맞붙은 두 싸움소가 뿔치기로 상대를 공격하고 있다.
경기를 시작한 지 15분이 지났다. 좀처럼 승부가 가려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백중세다. 내뿜는 거친 숨소리가 장내를 압도한다. 관중들은 숨을 죽인 채 둘의 움직임을 바라본다. 경기를 시작할 때는 범수가 분위기를 잡았다. 범수의 특기는 뿔치기. 뿔치기는 고난도 공격 기술이다. 상대 소의 뿔을 자신의 뿔로 걸어 누르거나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들어 올리는 기술이다. 상대를 제압하는 힘과 날렵한 기술이 동시에 필요하다.
범수는 매우 적극적인 공격 기술로 지난 5경기에서 4승 1패의 상승세를 타고 있다. 몸무게 698㎏로 싸움소 체중에서 가장 가벼운 체급이다. 비녀 형태의 뿔은 길이는 23㎝로 뿔치기 하기에 적당하다. 나이는 열살로 싸움소로는 노장에 속한다. 소싸움 데뷔 6년 차로 총 전적 33전 21승 2무 10패. 승률 68%로 비교적 높은 편이다.
범수에게 한 치의 양보를 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상대방은 브이. 브이의 특기는 밀치기다. 밀치기는 소싸움의 가장 기본적인 기술로 서로 머리를 맞대고 밀어붙여야 하기에 강한 정신력과 체력이 필수적이다. 상대방의 공격과 수비의 움직임을 감지하며 적절하게 대응해야 하기에 동물적 감각이 요구된다. 브이의 최근 전적은 1무 4패. 몸무게 687㎏으로 상대방보다 9㎏ 정도 가볍긴 하나 지난겨울 체력 훈련으로 자신감이 넘친다. 여덟살로 싸움소 데뷔 5년 차다. 총 전적 37전 17승 6무 14패로 승패는 반반 정도다. 동급 순위에서 브이가 15위, 범수가 28위로 브이가 앞서지만, 최근 상승세를 타고 있는 범수의 노련함에 쉽사리 승부를 예측할 수 없다. 둘은 이전에 한 번도 맞붙은 적이 없다.
▶상대에 제압당한 싸움소는 반격을 노린다.
▶승부를 결정짓는 브이의 옆구리 공격
패자에게 너그러운 소만의 특성
경기 시작부터 범수는 자신의 특기인 뿔치기를 앞세워 줄기차게 브이를 괴롭혔다. 브이는 자신의 특기인 밀치기로 상대를 제압하려 했지만 사정권에 잘 들어오지 않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소싸움이 1~3분 안에 끝나지만 서로 뿔을 교차하고 머리를 맞댄 채 오래 버티는 경기가 되면 관중들은 또 다른 소싸움 매력에 빠져든다.
소싸움의 승부는 간단하다. 일반적으로 야생동물들은 앞발이나 날카로운 이를 이용해 상하 좌우에서 공격하면서 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소는 머리와 뿔만 이용한다. 뒤에서 공격하지 않는다. 경기가 단순해서 싱거운 듯 하지만 우직하다. 팽팽하게 싸우다가 고개를 돌려 달아날 방향을 찾거나 입에 거품을 뿜으며 혀를 빼물면 승부가 난다.
또 배가 들쭉날쭉하면서 똥을 누며 도망가기도 한다. 승패는 패자가 고개를 돌려 도망가는 것으로 끝난다. 이긴 소는 도망치는 소를 절대 추가로 공격하지 않는다. 패자에게 너그러운 소만의 특성이다. 각 경기는 30분을 초과하지 않고 단판 승부다.
시간이 흐르면서 범수의 숨소리가 눈에 띄게 거칠어진다. 브이가 자신의 뿔치기를 노련하게 피하며 이마를 들이대고 파고든다. 범수는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정면 승부를 선택했다. 범수도 밀치기로 승부를 노린 것이다. 뒷다리에 힘을 주고 모든 힘을 이마에 집중시킨 채 브이를 압박했다.
하지만 절치부심하며 승리가 목마른 브이는 바로 이 순간을 노렸다. 범수가 힘을 이마에 집중한 틈을 타 몸을 왼쪽으로 틀어 범수의 몸을 앞으로 쏠리게 한 뒤 옆구리를 자신의 뾰족한 뿔로 공격했다. 전광석화 같은 기습이었다. 오랜 대치로 힘이 빠질 대로 빠진 범수는 불의의 옆구리 공격을 당하며 전의를 상실했다.
고개를 돌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경기 시작 15분 38초 만에 브이의 승리로 끝났다. 브이는 최근 무승의 슬럼프를 딛고 오랜만에 승리의 기분을 맛보았다. 경기에서 이기면 소 주인은 출전료 외에 승리수당을 챙긴다. 오늘 저녁엔 지친 몸에 다시 원기를 채워줄 특식이 제공될 것이다.
▶팽팽한 소 싸움의 긴장감은 한순간 무너진다. 방심하는 순간 승패가 갈린다.
▶패배를 인정한 범수가 도망가기 시작했다. 승자인 브이는 잠시 쫓아가다가 자신의 승리를 확인하고 더이상 추격하지 않는다.
코로나19로 중단됐다 1년여 만에 재개
4월 3일 경북 청도의 소싸움 전용 경기장에서 소싸움이 진행됐다. 소싸움은 전 세계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만 펼쳐진다. 코로나19로 2020년 2월부터 중단됐다가 1년 만인 2021년 3월 20일 경기를 재개했다. 2021년 소싸움 경기는 12월 25일까지 매주 토~일요일 각각 12경기씩 진행되고 하루 입장객 수는 2000명으로 제한된다. 경기 3일 전부터 누리집에서 사전 예약해야 입장할 수 있다. 매 경기 15분 전부터 승패를 예측하는 우권을 판매한다. 관중들은 싸움소의 전적과 몸 상태 등을 자세히 살펴서 최고 10만 원까지 우권을 살 수 있다.
소싸움의 유례는 여러 주장이 있다. 삼국시대에 신라가 백제와 싸워 이겨 잔치를 벌이며 시작했다는 설과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선의 소를 많이 잡아먹어 소들을 위령하기 위해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또 고려시대부터 산에 소를 데려가 풀을 먹이면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소끼리 싸움을 붙였다는 설과 수소가 암소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것에 사람들이 개입했다는 설도 있다.
우리 민족의 전통인 소싸움은 추석을 전후해 벌어지는 마을 큰 잔치였다. 농경사회에서 소는 가장 중요한 동물이었다. 힘센 소를 가진 사람들은 싸움소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소를 깨끗하게 씻긴 다음 가지각색의 천으로 정성 들여 꼰 고삐를 매고 아름다운 천으로 소머리를 둘렀다. 목에는 큰 방울을 달아 멋을 냈다. 소 주인 역시 깨끗한 무명옷으로 갈아입었다. 소싸움 터에는 많은 구경꾼이 몰렸고 자기 마을 소를 향해 풍악을 울리며 응원했다. 구경꾼들은 돈이나 술, 담배 등을 걸고 내기를 하기도 했다.
소싸움이 벌어지는 장소로 상설 소싸움 전용 경기장이 있는 경북 청도와 경남 진주와 창원, 창녕, 의령, 함안, 합천 등이 있는데 대부분 향토 축제의 부대 행사로 소싸움 대회를 개최한다.
▶30년간 싸움소를 기른 김황곤 씨가 소싸움의 매력을 이야기하고 있다.
▶청도 실내 소싸움 전용 경기장. 코로나19 탓에 객석의 20%만 수용한다.
▶우권매표소에서 관중이 행운을 바라며 우권을 구입한다.
“소싸움을 세계 관광 상품으로 키우자”
청도 소싸움 전용 경기장은 마치 이종 격투기 경기장 같은 분위기다. 실내 경기장의 한가운데는 잘 다듬어진 모래 경기장이 있고, 경기장에 집중하도록 관중석을 원형으로 만들었다. 매 경기 전 전광판에 경기에 나올 싸움소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나오고 장내 아나운서는 박진감 넘치는 목소리로 등장할 소를 소개하며 분위기를 잡는다. 관중석에는 가족들도 많이 눈에 띈다. 어린아이를 옆에 앉혀놓고 전통 소싸움을 설명하는 부모도 있다. 비록 동물 학대의 논란이 없진 않지만 서양의 투우와 달리 피 튀기는 잔인함은 덜하다.
소들의 다양한 공격 기술이 펼쳐질 때마다 환호성이 커졌다. 들치기는 자신의 머리를 상대 소의 목에 걸쳐서 공격하는 기술이다. 목치기는 자신의 뿔로 상대의 목을 치는 기술이고 머리치기는 정면에서 상대 소의 머리를 머리로 공격 하는 기술이다. 옆치기는 상대 소의 옆구리를 공격하는 기술로 성공하면 경기가 끝나는 결정적인 공격 기술이다. 바로 브이가 범수를 제압한 필살기이기도 하다.
이날 소싸움에 등장한 가장 덩치 좋은 소는 루돌프다. 몸무게 1165㎏으로 밀치기가 특기다. 총 전적 15승 8승 7패의 4년 차 싸움소다. 루돌프의 상대는 3승 무패의 백범이다. 백범은 자신보다 220㎏ 더 나가는 루돌프의 웅장함에 눌려 경기 시작부터 꽁무니를 빼며 맞대결을 피해 57초 만에 판정패했다.
루돌프의 주인은 소싸움 경력 30년의 김황곤(63) 씨. 김씨는 모두 세 마리의 싸움소를 키우고 있다. 5년 전엔 우승도 했다. 김씨는 “소싸움의 백미는 역시 끈기와 인내의 밀치기 승부”라며 “우리 민족 전통의 소싸움을 세계적인 관광상품으로 발전시킬 요인이 많다”고 말한다. 소싸움 경기장에 굵고 묵직한 ‘음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전의를 불태우며 싸움소가 등장하고 있다.
이길우_ <한겨레신문> 창간 작업에 참여해 34년간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한민족과 이 땅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찾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한민족의 무예, 공예, 민간신앙 등을 글과 사진을 통해 꾸준히 발굴·소개한다. 저서로 <고수들은 건강하다>, 사진집 <신과 영혼의 몸짓 아첼레란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