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남, ‘인왕제색도-사계’, LED TV, 4분, 2009│사비나미술관
움직인다. 그림이 움직인다. 시간이 흐른다. 그림 속에서 시간이 흐른다. 마술이 아니라 현실이다. 이것이 현대미술이다. 과거의 그림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지가 얼음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액자에 갇힌 그림 속 시간 역시 멈추어 있었다. 그런데 사정이 달라졌다. 언젠가부터 그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그림’의 탄생! 마치 얼음이 녹듯 그림 속 이미지가 살아서 꿈틀댄다. 덩달아 액자 속 시간도 모래시계처럼 흐른다. 꼼짝 않던 그림이 스스로 움직이면서 많은 게 변했다. 오늘날 그림은 과거보다 더 많은 이미지와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래서 관객은 그림 앞에서 더 오랫동안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그림 속에 숨은 내러티브(줄거리)와 시간성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움직이는 그림을 생각하면 ‘영화’가 떠오른다. 하지만 엄밀히 보면 영화는 그림이 아니다. 그림보다 사진에 가깝다. 1800년대 말 프랑스의 발명가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탄생한 영화는 그것보다 조금 앞서 발명된 ‘사진술’을 한 단계 발전시킨 기술과 과학의 결과물이다. 물론 ‘애니메이션’처럼 움직이는 그림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림과 사진은 재현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매체임엔 여전히 변함없다. 그림은 화가의 상상만으로도 그릴 수 있다. 하지만 사진은 실제로 눈에 보이는 사물, 즉 대상이 없으면 아무것도 재현할 수 없다.
▶이이남, ‘인왕제색도-사계’, LED TV, 4분, 2009│사비나미술관
비디오 아트 넘어서 ‘무빙 픽처’ 세계로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통로는 여러 갈래다. 그 가운데 하나가 ‘움직임’이다. 물론 키네틱 아트(kinetic art, 동작 예술)라는 조각 장르가 있긴 하다. 서울 신문로 흥국생명 사옥 앞에 설치된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망치질하는 사람(Hammering Man)’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미지가 움직이지는 않는다. 단순한 기계장치를 사용한 ‘움직이는 오브제(물체)’에 가깝다. 그러니 여기서 느끼는 시간의 경험은 끝없는 반복뿐. 극적이고 서사적인 내러티브가 없다. 그래서 지루하다. 반면 ‘무빙 픽처(moving picture, 움직이는 영상물)’는 그렇지 않다.
현대미술은 가치전복의 역사다. 같은 맥락에서 백남준이야말로 전통적인 미술개념을 송두리째 뒤집은 혁명적 인물이다. 백남준이 창시한 비디오 아트 이후 미술은 과거와 완전히 다른 장르가 됐다. 캔버스나 물감, 돌, 나무, 종이 같은 ‘물질’의 영역에서 ‘비물질’의 세계로 확장된 것. 백남준 이후 빛, 소리, 움직임처럼 과거 미술에서 통용되지 않던 요소가 적극 반영됐다. 더불어 그림의 색채, 컬러를 보기 위해서 ‘밝은 방(white cube)’이 필요했다.
하지만 백남준 이후 현대미술은 ‘어두운 방(dark room)’이 더 적합하다. 모니터에 구현된 비물질-빛-영상을 보기 위해선 외부의 밝은 빛은 오히려 방해가 된다. 어두워야 더 잘 보이는 비물질-빛-그림이 지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움직이는 그림의 탄생도 이와 같은 혁신적 발상의 결과물인 셈이다.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한 이이남 작가는 ‘백남준의 후예’로 불린다. 백남준이 개척한 비디오 아트를 계승, 한 단계 발전시킨 뉴미디어 아티스트다. 여기서 말하는 ‘뉴미디어’란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다른 이름이다. 최첨단 컴퓨터그래픽 프로그램으로 구현한 이이남의 움직이는 영상은 ‘21세기 무빙 픽처’의 전형이다.
▶이이남, ‘인왕제색도-사계’, LED TV, 4분, 2009│사비나미술관
전문성과 대중성을 성공적으로 획득
이이남의 작품은 다양한 차원에서 이원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진짜와 가짜, 가상과 현실, 물질과 정신, 디지털과 아날로그, 그리고 창작과 인용 등 대립적인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이 가운데서 무엇보다 두드러진 주제는 전통과 현대에 관한 문제. 동서양의 명화를 차용하면서 동시대 문화론적 차원에서 비평적 논쟁의 단서를 제공한다. 그가 창조한 무빙 픽처엔 심오한 철학적 사유가 담겨 있다.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듯 전문성과 대중성을 성공적으로 획득했다.
평범한 그림을 보듯 스치듯 지나가면 이이남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 작품 하나하나 충분한 시간을 할애해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1676~1759년)의 ‘인왕제색’을 디지털로 번안한 ‘인왕제색도-사계’(2009년)의 진면목을 보기 위해선 4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름다운 금강산이 전쟁터로 변하는 ‘신-금강전도’도 마찬가지. 소요 시간이 7분 10초에 이른다.(움직이는 화면의 일부만 인쇄된 이미지로 소개할 수밖에 없어 못내 아쉽다. 이이남 작가 누리집에 공개된 원본 영상 관람을 추천한다.) 이처럼 이이남은 널리 알려진 옛 명화에 상상력과 디지털 기술을 결합시켜 풍부한 볼거리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덧붙이자면 이이남의 영상이미지만 보는 건 반쪽짜리 감상법이다. 모니터를 활용한 설치방식, 즉 병풍, 폭포, 달항아리 등 다양한 형식으로 꾸며진 실제 전시 광경을 함께 봐야 제대로 된 감상이라 할 수 있다. 전남 담양 죽녹원 내에 있는 이이남아트센터와 2020년 광주광역시 양림동에 문을 연 이이남스튜디오에서 이이남 작품을 볼 수 있다. 4월엔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사비나미술관에서 개인전도 열린다.
이준희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_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