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온 첫해. 지독한 장마를 겪으며 습함에 치를 떨던 그때 장마의 습기보다도 떨어져 나간 벚꽃잎이 가여워 장마가 미웠다. 여리고 하얀 꽃잎이 굵은 장대비를 맞고 여지없이 떨어져 나가 벚나무에 봄은 사라지고 여름만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장마에 봄을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사실 나는 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여름이 영원하길 바라며 제주로 와서 서핑을 즐기지 않았는가!
그러던 나도 정원을 가꾸며 봄을 만나기 시작했다. 얼어 있던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을 바라보다 코를 박고 흙내음을 맡는다. 땅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기운과 건조함과 차가움에서 깨어나는 그 내음이 좋았다. 초록에서 파랑, 노랑, 하얀색이 섞인 분홍 등 그림이나 사진으로는 차마 그대로 담을 수 없는 빛깔을 가만히 보고 있다. 사진도 찍는다. 그때 무릎을 탁 치며 엄마의 휴대전화 속 형형색색 꽃사진들을 이해하기로 했다.
초봄에 피는 카모마일, 물망초, 튤립, 수선화와 같은 꽃들이 피고 질 때쯤 세이지나 팬지, 안개꽃, 조팝나무가 지고, 장미와 백일홍 같은 꽃나무과들은 여름까지도 꽃을 지킨다. 또 어떤 식물은 꽃이 피지 않지만 이파리 그대로 아름다운 것들도 있다. 혹은 꽃이 피도록 씨를 물고 오는 새나 꽃의 꿀을 즐기는 벌, 묵묵히 영양을 주는 토양, 토양이 되기 위해 떨어진 낙엽, 땅속을 파고드는 지렁이처럼 정원을 구성하는 생명들은 보이지 않게 다양하다. 보이지 않지만 저 멀리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태양이나 지나가는 공기와 바람처럼 말이다.
나는 정원의 봄이 못내 아쉬워 6년째 봄을 기다리는 중이다. 어쩌면 나는 정원에서 존재의 안정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느껴보지 못하다 알게 된 봄 자체 그리고 꽃이 아니라도 자연의 한 일원으로서 역할을 다하는 정원 속 어느 무당벌레처럼 이 안에 있는 무엇처럼 나란 인간도 무언가 보태어지겠지, 하고 말이다.
내일부터 고사리 장마(제주도에서 봄철 고사리가 나올 때쯤인 4월에서 5월 사이에 내리는 장마)가 시작되니 전국민들 들썩이게 하던 벚꽃도 안녕을 하겠지. 이제 이 장마가 끝나면 장에 나가 할머니들이 한라산에서 캐온 고사리와 바다 전복을 사다 달래간장을 만들어 비빔밥을 해먹어야겠다. 안녕! 봄아!
윤진서 배우_ 2003년 영화 <올드보이>로 데뷔 후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으며, 책 <비브르 사비> 등을 썼다. 최근 유튜브 채널 ‘어거스트 진’을 개설했다. 자연 친화적인 삶을 지향하며 제주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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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