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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플랫폼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콘텐츠에는 중요한 두 가지 변화가 생겼습니다. 첫 번째는 글이든 영상이든 상관없이 모든 콘텐츠가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는 것, 두 번째는 글이나 사진 등이 동영상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새 너무 힘들어요, 선배. 저는 제가 타고난 기자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아닌가 봐요.”
얼마 전 친한 기자 후배를 오랜만에 만났는데 안부를 묻기도 전에 이렇게 말하며 한숨부터 내쉬더군요. 후배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니 피곤함이 구석구석 배어 있었고요.
“기자 일이 원래 힘들지 그걸 뭐 처음 안 사람처럼 그래. 무슨 일 있니?”
제 물음에 후배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꽤 긴 하소연을 늘어놓았습니다. 후배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저도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있더군요. 함께 심각한 표정이 돼서는 말이죠.
“취재하고 기사 쓰고 하는 게 갑자기 힘들어진 건 아니에요. 그런데 회사에서 취재랑 기사 쓰기 말고도 추가로 하라는 게 갈수록 많아져서요. 이제는 인터넷판에 기사를 더 빨리, 더 자주 쓰라고 하는 수준을 넘어서 방송 출연도 꽤 많이 해야 하고, 어떨 땐 동영상 편집도 해야 해요. 솔직히 요즘은 제가 신문기자인지, 방송기자인지, 누리소통망 유명인(SNS 인플루언서)인지 잘 모르겠어요.”
방송국에서 프로듀서(PD)로 있을 때 함께 일한 후배 PD는 전화로 이렇게 울상을 짓기도 했습니다.
“형, 이제는 글쓰기도 배워야 할 판이에요. 원래 프로그램 편집은 PD가 하고 자막은 작가가 쓰잖아요. 요샌 갈수록 경계가 없어져요. 자막까지 쓰는 PD가 점점 많아지고, 또 자막을 작가만큼, 아니 어떤 경우는 작가보다 더 잘 쓰는 PD도 많아요. 누리소통망에 올리는 짧은 영상들은 PD들이 자막을 대부분 써요. 자막을 잘 쓰지 못하면 능력 없는 PD가 돼요.”
플랫폼 경계가 모호해지는 디지털 시대
디지털 시대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플랫폼(정보 시스템 환경을 구축하고 개방해 누구나 다양하고 방대한 정보를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는 기반 서비스)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엔 신문, 텔레비전, 책, 음반, 라디오, 잡지 등이 모두 명확하게 다른 플랫폼이었죠.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신문기자는 종이신문뿐 아니라 회사 누리집이나 포털, 누리소통망 등 디지털 플랫폼에도 기사를 써야 합니다. 디지털 기사에 함께 덧붙이는 사진이나 동영상을 취재기자가 직접 찍거나 편집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방송국 PD들은 어떨까요? 예전엔 자신이 속한 방송국 채널의 본방송 시간에 맞춰 프로그램을 제작, 송출하면 끝이었지만 디지털 시대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본방송 전에 프로그램 티저(teaser trailer, 시청자의 호기심을 끌기 위해 1~2분 길이로 짧게 제작하는 방송 예고편)를 여러 개 만들어 텔레비전 채널은 물론 여러 디지털 플랫폼에 올려야 합니다. 본방송이 끝나면 방송 내용 가운데 시청자에게 인기를 끌 만한 내용들을 다시 2~5분 정도 분량으로 재편집해 누리소통망 등에 또 올려야 하죠. 화면을 돋보이게 할 자막도 함께 고민해가며 써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요.
기업에 다니는 회사원들의 일하는 방식 역시 디지털 시대엔 크게 달라졌습니다. 예전엔 문서나 프레젠테이션으로 끝났을 보고서에 이제는 동영상까지 넣어야 합니다. ‘메신저 지옥’에 갇혀 출퇴근 시간이 사라졌다는 푸념도 나옵니다.
갈수록 짧아지고 동영상으로 바뀌어가는 콘텐츠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플랫폼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수준을 넘어 사라지게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문이 방송이고, 방송이 책인 시대. 책이 라디오고 잡지가 음반인 시대가 곧 우리 앞에 다가올 겁니다. 이미 상당 부분 그렇게 되고 있고요. 특정 영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사회 모든 영역에서 이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죠.
각자의 영역을 안전하게 지키고 있던 플랫폼이 무너지고 결국은 사라지는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경쟁력을 잃고 뒤처지다가 결국은 떠나야 하겠죠. 우리 모두 정신을 차려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특히나 신문, 방송, 드라마, 영화, 광고, 홍보, 출판 등 무엇인가 독창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직군에서 일하는 크리에이터(creator, 창작자)는 더 그렇죠.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에이터들의 경쟁력에 대해서는 뒤에 몇 차례에 걸쳐 함께 얘기 나눌 기회가 있을 겁니다.
오늘은 플랫폼 변화가 콘텐츠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만 간략하게 언급해볼까 합니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플랫폼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콘텐츠에는 중요한 두 가지 변화가 생겼습니다. 첫 번째는 글이든 영상이든 상관없이 모든 콘텐츠가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는 것, 두 번째는 글이나 사진 등이 동영상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문기자도 동영상을 편집하고, 1시간짜리 프로그램만 만들던 PD도 5분짜리 동영상을 또 만들어야 하죠.
많은 사람들이 지능형 단말기(스마트폰)로 대부분의 콘텐츠를 소비하면서 이런 현상은 앞으로 더 심해질 겁니다. 크리에이터의 고민도 깊어지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디지털 시대의 콘텐츠들은 모두 짧고, 동영상으로 만드는 게 바람직할까요? 종이책은 이제 그만 내려놓고, 듣거나 보는 책을 만나야 할까요? 디지털 시대의 콘텐츠는 뼛속부터 다른 것이어야 할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하. 구체적인 얘기들은 앞으로 차근히 함께 나눠보려 합니다. 그럼 다음 호에 생각할 거리를 들고 다시 돌아오죠.
이상록 국민권익위원회 홍보담당관_ <동아일보> <한겨레> 등에서 기자로 일했고,〈tvN〉에서 책임프로듀서(CP)로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었다. <언론분쟁 뛰어넘기>(2011), <누구나 알지만 아무나 못 하는, 글쓰기 비법>(2020)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