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캔버스에 유채, 131×175cm, 1876. 오르세미술관 소장│ⓒwikipedia commons, public domain
프랑스는 예술의 나라다. 20세기가 막 시작될 즈음, 파리는 전 세계 예술가들이 흠모하고 꿈에 그리던 선망의 무대였다. 불세출의 천재화가 파블로 피카소도 이 무렵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의 작업실에서 창작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떠오르면서 예술 분야의 권력 지형에도 일대 변화의 바람이 일었지만 프랑스는 여전히 지구촌 문화예술계의 큰손으로 군림하고 있다. 당연히 위대한 화가도 많이 배출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도 그중 한 명이다. 19~20세기 초 프랑스를 대표하는 인상주의 화가로 평가받는 그는 한 살 위의 클로드 모네와 함께 프랑스 화단을 주름잡았다.
동시대에 활동한 두 사람은 시시각각 변하는 빛에 따라 색채와 형태가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천착한 인상파 동료였지만 인상주의 화풍을 구현하는 방식은 사뭇 달랐다. 인상주의라는 명칭의 유래가 된 작품 ‘인상, 해돋이’(1872)에서 알 수 있듯, 자연 풍경을 통해 인상주의를 탐색한 모네와 달리 르누아르는 인물화, 특히 여인의 모습 속에 인상주의 화풍의 특징들을 담아냈다. 모네와 마찬가지로 다른 인상파 화가들도 주로 풍경을 대상으로 인상주의 정신을 탐구했다는 점에서 르누아르의 행보는 확실히 이례적이다. 무엇보다 르누아르의 그림은 화사하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유쾌하고 감미롭다. 이 때문에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그림이 지닌 치유(힐링) 효과를 확실히 보여주는 본보기라 할 만하다.
햇빛의 효과 포착에 눈뜬 르누아르
르누아르는 1841년 프랑스 중서부 오트비엔주의 비엔강 연안 리모주에서 가난한 양복점집 아들로 태어났다. 13세 무렵에 도기 공방에 들어가 도자기에 그림이나 장식용 무늬를 그려 넣는 일을 하면서 기본적인 데생과 색채에 눈떴으나 1차 산업혁명 촉발의 계기가 된 새로 발명된 기계가 자신의 업무를 대신하자 공방에서 쫓겨났다.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된 르누아르는 악조건 속에서도 그림에 대한 열정의 끈을 놓지 않고 1862년 마침내 국립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며 샤를 글리에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만난 동료가 모네와 피사로, 시슬레, 바지유 등으로 훗날 인상주의 미술을 이끈 핵심 인물들이다. 이들은 파리에서 남동쪽으로 60여 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아름다운 퐁텐블로 숲에서 그림을 그리며 의기투합했다.
르누아르가 1867년에 그린 ‘양산을 든 리즈’는 애인인 리즈 트리오를 모델로 한 초상화로 그의 초기 작품 중 가장 유명하다. 이 그림은 실내가 아닌, 야외에서 직접 보고 그린 풍경화를 뜻하는 외광회화(外光繪畵) 시대를 연 시조 격의 작품이다. 이전까지는 야외에서 풍경을 스케치한 뒤 작업실에서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특히 르누아르는 1869년 파리 센강 변의 유명 관광지인 라 그르누이에르의 풍경을 모네와 함께 그리는 야외사생(野外寫生) 훈련을 통해 햇빛의 효과를 포착하는 데 눈뜨기 시작했다.
그 정점을 찍은 작품이 바로 1876년에 완성한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다.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에 위치한 대중적인 야외 무도회장의 풍경을 그린 이 그림은 르누아르가 시도한 인상주의 양식의 다양한 특징들이 압축되어 있는 걸작이다. 햇빛과 대기가 시간의 흐름과 환경에 따라 얼마나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이는지, 또 인간의 눈이 가진 기능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입증하는 훌륭한 그림이다. 인물들의 윤곽선을 흐릿하게 처리하고, 세부 묘사를 생략하고 뭉개듯이 대충 그렸는데도 빛과 그림자를 이용한 명암 대비를 통해 형상 표현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놀라운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르누아르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아들 피에르는 배우로 활동했으며 둘째 장은 아카데미상을 받는 등 프랑스의 유명 영화감독으로 맹활약했다. 2014년에는 르누아르의 인생 말년을 소재로 한 영화 <르누아르>가 개봉되기도 했다.
생생하게 전해오는 흥겨운 무도회장 풍경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는 산이 없는 파리에서 제일 높은 몽마르트르 언덕 꼭대기에 있는 대중 야외 무도회장의 일요일 오후 시끌벅적한 풍경을 묘사한 작품으로 르누아르의 대표작이다. ‘그림은 예쁘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르누아르의 지론이 고스란히 담긴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낭만적이고 흥겨운 무도회장에서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는 남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런가 하면 쌍쌍이 춤을 추는 커플들의 흥을 돋우는 감미로운 음악 소리가 귓전을 간질이듯,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진다.
세로 131cm, 가로 175cm 크기로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이 그림에는 수많은 사람이 등장하는데, 한결같이 편안하고 행복한 모습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얼굴이나 옷가지에서 뚜렷한 윤곽선을 발견할 수 없고, 형태가 뭉개진 것처럼 보인다. 즉흥적으로 재빨리 눈앞의 광경을 그리기 위해 물감을 팔레트 위에서 섞지 않고 캔버스에서 색을 문질러 번지게끔 칠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형태의 세부 묘사와 정밀 묘사를 생략하고 빛에 반사되는 풍경과 인물들의 인상만 강조한 것이다. 그럼에도 인물들의 형태가 아주 자연스럽다. 인물들의 얼굴로 쏟아지는 햇빛 효과로 피부에 생기가 돈다. 빛과 그림자의 절묘한 대비에서 오는 조화와 균형의 결과다. 이와 관련해 저명한 미술사학자 곰브리치는 만약 르누아르가 이 그림의 디테일을 세밀하게 묘사했다면 오히려 진부하고 생동감이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림 속 모든 인물의 옷과 얼굴, 머리 위로 반짝거리는 햇볕이 내리쬐고 있는데, 마치 알록달록한 얼룩 또는 자국 같다. 그림 전반을 가득 채운 햇빛의 존재는 화사하고 따사로운 한낮의 기운을 극적으로 연출하고 있다. 춤추는 사람이나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나 모두 표정이 한없이 여유롭고 행복해 보이는데, 당시 이 무도회장이 얼마나 인기 있었는지를 실감케 한다.
르누아르는 이 그림을 위해 몽마르트르 언덕 근처에 작업실을 차려놓고 1년 넘게 매일같이 무도회장을 찾아 햇빛의 변화를 연구하고 스케치를 했다고 하니, 그가 이 작품에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물랭은 풍차, 갈레트는 과자 이름이다. 인상주의 그림으로 유명한 파리 오르세미술관에 가면 작품을 볼 수 있다.
박인권_ 문화 칼럼니스트.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스포츠서울>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와 사랑에 빠진 그림>(2001), <미술전시 홍보, 이렇게 한다>(2006),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이상 2006)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