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서(崔奎瑞·1650~1735)는 영의정까지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에게는 조금은 낯선 숙종, 영조 때의 인물이다. 해주 최씨로 세종 때 한글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던 최만리 집안이어서인지 숙종에 정면으로 맞서는 강단을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다.
1680년(숙종6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살이를 시작했는데 마침 이때는 숙종이 남인을 제거하고 서인들을 중용할 때였다. 따라서 당색으로 서인이었던 그는 초반 관운이 좋아 요직을 거치며 고속성장을 한다. 사간원 정언으로 있을 때는 숙종이 서북인들에게도 홍문관 관리의 자격을 부여할 것을 명하자 ‘서북에는 인물(人文)이 황폐하고 적합한 인물이 없다’는 논지의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 점에서는 조상 최만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질 때는 소론을 택한다. 그것은 일종의 온건 친왕 노선을 택했다는 뜻이다. 1689년 사간원 책임자인 대사간으로 있을 때는 남인에 맞서 장희빈의 왕비책봉에 반대하는 데 앞장섰다. 적어도 남인에 대해서는 상당히 강경한 입장이었다.
이후 숙종이 소론을 중용할 때 그는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형조, 예조판서와 대제학 등을 두루 거쳤다. 그가 이렇게 벼슬길에서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당파 때문은 아니었다. 이에 대해서는 그가 훗날 세상을 떠났을 때 영조가 내린 글을 통해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다.
“청렴하고 근신하는 지조와 기미(幾微)를 먼저 알아보는 명석함으로써 몸을 깨끗이 하였다.” 그의 이 같은 지조와 기개는 숙종이 후대를 위해 소론을 버리고 노론과 타협하려 했을 때 여지없이 드러난다. 1711년 소론을 이끌던 최명길의 손자 최석정 등이 삭탈관작 되고 1716년 노론이 득세하자 최규서는 고향인 경기도 광주에 내려가 은거에 들어갔다. 이후 숙종이 그를 아껴 수없이 조정으로 다시 나와 줄 것을 청했으나 최규서는 끝내 숙종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숙종의 성품으로 볼 때 이 정도로 버티려면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하기 힘든 거절이었다.
1721년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즉위하고 소론이 정권을 장악하자 비로소 조정에 다시 나온 그는 우의정을 거쳐 2년 후에는 영의정에까지 오른다. 당시 최규서는 노론의 공세에 맞서 경종을 보호하고 소론의 영수자리를 지켰지만 동시에 소론내 강경파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즉 노론을 소탕하려는 김일경 등의 강경노선에는 반대하고 소론 내 온건파를 이끌었다. 그랬기 때문에 1724년 노론의 지원에 힘입은 영조가 즉위했을 때도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이는 마치 노론 내 동래 정씨 집안의 온건함을 연상시킨다.
최규서는 이후 나이가 많아 용인에서 은거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영조4년(1728년) 김일경의 잔당인 이인좌 등이 난을 일으키자 80에 가까운 노구를 이끌고 직접 도성으로 달려와 반역의 실상을 고했다. 사실 노론 정권하에서 같은 소론의 역모를 고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인좌의 난이 진압된 이후 공훈을 사양했다. 영조로서는 참으로 고마웠을 것이다.
1735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영조가 “종묘사직과 나라를 깊이 사랑하여 먼저 적당의 간담을 꺾어 버려 세상에 다시없는 공을 세웠는데도 힘써 훈명을 사양하여 항구불변한 지조를 이룩하였다”고 평한 것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당쟁의 와중에도 균형을 잡으려 애썼던 최규서의 지혜는 지금도 깊이 새겨볼 만하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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