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로 한 집안 3대(代)가 장원급제한 이들이 김천령(金千齡)-김만균(金萬鈞)-김경원(金慶元)이다. 그런데 이들은 왜 한 명도 정승이 되지 못했을까?
1496년(연산 2년) 병진(丙辰) 식년시에서 장원급제한 김천령은 고속승진을 거듭해 홍문관 부응교를 거쳐 사헌부 집의(執義·종3품)에까지 오른다. 실록은 그에 대해 “자기 의사를 밝힐 때는 경전(經典)에 근거하여 명백하고 조리 있게 말함으로써 임금의 뜻을 크게 움직였다”고 평한다. 그러나 1503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게다가 이듬해 연산군이 갑자사화를 일으켰을 때 김천령은 직간(直諫)을 많이 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한다. 김천령은 중종반정으로 명예를 회복하고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된다.
아버지 김천령이 장원급제할 때 두 살이었던 김만균은 1528년(중종 23년) 별시(別試)에서 장원급제한다.
김만균도 아버지의 깐깐함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장원급제자답게 세자시강원 사서(司書·정6품)로 관직생활을 시작한 3년 후인 1531년(중종 26년) 홍문관 수찬(修撰·정6품)으로 있을 때 당시 최고의 권력 실세인 김안로를 탄핵했다가 관직에서 쫓겨났다. 1537년 김안로가 축출되자 다시 관직에 기용되어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치며 승진을 거듭해 1544년 예조참판에 오르고 강원도 관찰사 등을 지내지만 결국 중추부 동지사(종2품)로 재직 중 세상을 떠났다.
그에 관한 실록의 졸기(卒記·사후 인물평)가 인상적이다. “젊었을 때는 경박하다는 말을 들었으나 장성하자 자신의 결점을 스스로 깨달아 끝내는 중후한 사람이 되었다.” 이 졸기가 사실이라면 김만균은 판서는 물론이고 정승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55세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버지나 아들 모두 단명(短命)의 고비를 넘지 못했다.
1553년(명종 8년) 김만균의 아들 김경원이 계축(癸丑) 별시에서 장원을 차지한다. 그런데 실록은 당시 장원을 차지한 김경원에 대해 혹평을 하고 있다. “성적 평가가 정밀하지 못하여 학문이 없는 김경원이 장원을 했다.”
이후 김경원은 사간원 정언(正言·정6품), 지평(持平·정5품)으로 승진하는데 1560년(명종 15년) 그가 지평이 됐을 때도 실록 사관의 평은 인색하다. “성품은 호방하고 의협심이 있으나 행실은 거칠고 비루했다. 요행히 과거에서 첫 번째로 뽑혔는데 많은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겼다.”
그리고 이때 권신(權臣) 이양에게 아부했다고 나온다. 이양에게 기댄 김경원은 이후 사헌부 장령(掌令·정4품)을 비롯해 홍문관, 사간원 등 핵심 요직을 거친다. 이미 권력의 맛을 본 김경원이었기에 동료 관리들의 평이 좋을 수 없었다. 계속되는 그에 관한 혹평도 실은 그와 무관치 않았다. 결국 김경원은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끝으로 관직생활에서 물러나게 된다.
한편 김경원의 동생 김명원(金命元)도 형보다 8년 늦은 1561년(명종 16년)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한다. 그의 문과 급제 동기 중에는 훗날 중앙정치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되는 이산해(李山海), 황윤길(黃允吉) 등이 포함돼 있었다.
퇴계 이황에게 학문을 익힌 바 있는 김명원은 문무겸전(文武兼全)에 인품까지 타고난 인물이었다. 문과 급제 이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 끝에 1584년 형조판서에 오르고 1589년(선조 22년) 의정부 좌참찬 겸 의금부 지사로 있을 때 정여립의 난 수습에 공을 세워 평난공신 3등에 책록된다.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팔도도원수로 한강 방어에 실패하지만 이후 전란수습에 공을 세워 6조 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우의정, 좌의정에 올라 ‘3대 장원급제 집안’의 정승이 되지 못한 한(恨)을 풀었다.
김명원은 인품 또한 출중했다. 보통 <선조실록>에서 극찬하는 인물에 대해 <선조수정실록>은 혹평을 하게 마련인데 김명원은 예외다. “김명원에 대해 시류에 따라 부침했다는 비방이 있으나 풍도(風度·풍채와 위엄)가 뛰어나 모두 재상의 그릇이라고 일컬었다.” 게다가 당시로서는 장수했다고 할 수 있는 68세까지 살았으니 정승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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