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연습 중인 학생들
경남 양산 웅상청소년아카데미
“우리 단편영화 한 편 찍어보지 않을래?”
이 한마디 제안에 학생들이 결국 일을 내고 말았다. 단편영화는커녕 동영상 한번 찍어본 적 없는 경남 양산의 초등학생들이 8월 28일 제3회 2019 성평등 콘텐츠 대상(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이 주최) 정기공모전 시상식에서 여성가족부장관상에 해당하는 청소년부 대상을 차지했다. 대상작 ‘환생’을 만든 주인공은 여성가족부가 초등학교 4~6학년과 중학생을 대상으로 전문 체험, 학습 프로그램 등 종합 서비스를 제공하는 청소년 방과후 아카데미 학생들이다. 청소년 방과후 아카데미는 보편적 복지를 지향하는 문재인정부의 ‘온종일 돌봄’ 정책 방향에 맞춰 올해 신청 가능한 소득수준 제한이 크게 완화됐다. 과거 저소득층 자녀 위주의 돌봄 지원에서 벗어나 많은 학생이 지원할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바뀐 것이다.
▶4월 양산시 청소년회관에서 웅상 청소년 아카데미 학생들이 양성평등 설문조사를 했다.
9월 10일 찾아간 양산 주진동의 웅상 청소년 아카데미에서는 왁자지껄 떠드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학생들에게 단편영화 제작을 제안한 김준영(34), 김수경(26) 청소년지도사는 웃는 아이들을 보면서 “심하게 밝은 친구들”이라며 농담을 건넸다. 양산의 초등학생들은 어떤 계기로 영상을 만들게 되었을까. 김준영 청소년지도사는 “정부에서 하는 프로그램이니까 혹시나 사람들이 교육의 질이 낮을 수 있다고 오해하는 게 싫었다. 청소년 방과후 아카데미는 10년이 넘은 정부 사업이라 안정기에 들어섰지만, 자칫 이 때문에 프로그램이 획일화되거나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이날 학생들은 양산소방서의 도움을 받아 ‘119 안전뉴스 콘텐츠’를 제작하려던 참이었다. 소방관들이 불을 피워주기로 했지만 예상보다 일찍 해가 지면서 야외 촬영은 하지 못했다.
“청소년 방과후 아카데미 교사는 매년 보수 교육을 받는데 이 교육을 받으면서 ‘프로젝트 기반 학습’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자기 주도적이고 창의적인 학습을 해야 하니까요. 저희 친구들한테도 ‘재미있게 놀아라. 새로운 걸 하자’고 늘 말해요. 이런 학습을 하면 아이들이 확실히 달라지거든요. 굉장히 소극적이어서 낯선 사람들과 말을 잘 하지 않는 친구가 있었는데 지금은 활발해져서 어머니가 좋아하세요.”(김준영 청소년지도사)
▶4월 양산시 청소년회관에서 웅상 청소년 아카데미 학생들이 동물 학대 금지 캠페인을 벌였다.| 웅상 청소년 아카데미
“어른보다 아이들 생각이 더 창의적”
웅상문화체육센터 건물 4층에 자리한 청소년 방과후 아카데미는 평일 오후 4시~7시 30분에 운영되며 등·하원 서비스와 저녁 식사를 제공한다. 주말에는 월 2회 각종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비용은 전액 무료다. 김준영 씨와 이야기를 나누다 저녁 식사 시간이 돼서 학생들과 식당으로 향했다. 같은 건물 1층에 자리한 식당에서 사진을 찍자 밥을 먹다 말고 카메라 앞에서 학생들이 장난을 쳤다. 식사가 끝나고 영어 수업이 시작돼서야 복도가 조용해졌다. 이곳에서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학습 지원(수학·영어), 전문 체험(체육·우쿨렐레), 자기개발 학습(영상 제작) 등으로 구성돼 있다.
학생들은 올해 초 프로젝트 기반 학습의 일환으로 전문 강사에게 민주주의 시민 교육을 받고 다양성을 주제로 영상을 만들기로 했다. 여성가족부가 2019년 청소년 방과후 아카데미 비전으로 제시한 것 중 하나가 민주시민 의식 향상이다. 민주주의와 시민의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4시간 동안 수업이 진행됐다. 다양성을 주제로 학생들이 어떤 영상을 만들지 토론을 거쳤다. 양성평등과 함께 동물 학대 예방이 소재로 선정됐다. 학생들에게 다양성 존중은 인간을 넘어 동물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이었다. 김준영 청소년지도사는 “솔직히 동물 학대가 소재로 선정될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가끔 보면 어른보다 아이들의 생각이 더 창의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
▶자율 학습을 하고 있는 웅상 청소년 아카데미 학생들 | 박유리 기자
수업을 들은 뒤 학생들은 4월 양산시 청소년회관에서 열린 청소년 어울림마당과 청소년 한마음 축제에서 양성평등 설문조사와 동물 학대 금지 캠페인을 벌였다. 학생들이 아이디어를 내어 설문조사 문항을 직접 만들었다. 축제에 마련된 부스에서 성인과 미성년 2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이고 양성평등을 지향하는 ‘소원 팔찌’ 만들기 행사도 열었다.
영상물 제작에 앞서 자신들의 회사 이름도 ‘웅상 키네마 주식회사’라고 지었다. 1월에 부산영화체험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한국 최초의 영화사 이름이 ‘조선 키네마 주식회사’임을 알게 된 것. 양산시 웅상 지역 최초의 영화사라는 의미에서 학생들이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영상을 찍은 뒤 확인하는 김준영 청소년지도사와 학생들
수업 듣고 영상 만들고 연기까지
영상 시나리오에는 학생들이 직간접적으로 겪은 양성 불평등 사례도 포함됐다. 주인공은 죽은 뒤 저승사자를 만나고 여성 또는 남성으로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망자가 어떤 성별로 태어날지 결정하지 못하자 저승사자는 남성과 여성으로 태어났을 경우를 각각 예상할 수 있다고 설명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영상 속에서 남자아이는 울지 않고 힘이 세며, 여자아이는 얌전하고 꾸미기를 좋아하도록 강요받는다. “남자애니까 팍팍 잘 먹어야지.” “남자가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 “남자가 피구도 못하고 답답해.” “여자는 늘 밥을 조신하게 먹어야 하는 거라고. 넌 또 왜 그렇게 앉아 있니? 여자는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 알겠니?”
주인공을 맡은 초등학교 6학년 이주영 양은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밥을 먹다 엄마에게 혼나는 상황을 꼽았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처럼 행동하는데 이렇게 행동하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잖아요.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니까요. 학교에서도 가끔 양성평등적이지 않은 대화가 오고 가요. ‘너는 왜 남자처럼 행동하냐?’ ‘남자가 왜 힘이 약해?’ 그런 말이요.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받으면서 더욱 이런 말은 안 하려고 노력하게 돼요. 수업들이 다 재밌어요. 어떤 주제를 정하면 그것에 관한 수업을 받고 나중에 영상을 만들거든요. 실제 영상을 찍으면서 연기를 하니까 ‘우리가 배운 내용이 이런 것이구나’ 체험하게 돼요.”
영상을 제작한 또 다른 이유는 직업 흥미 조사의 영향 때문이다. 2018년 1월 학생들을 대상으로 벌인 조사에서 방송 연예·영상 제작 관련 직업 선호율이 40%를 넘었다. 마침 양산영상미디어센터가 같은 건물에 입주해 있어 김준영 청소년지도사가 교육 협조를 구했다. 영상미디어센터 직원은 초등학생들에게 24회에 걸쳐 제작 기법을 강의했고 학교 폭력 예방, 미세먼지 등을 주제로 영상을 만들었다. 2018년도에는 ‘양산 8경’을 소개하는 홍보 영상을 제작해 양산시 전국 청소년 영상제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웅상 청소년 아카데미는 학부모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면서 대기 학생까지 생길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전체 인원 32명 가운데 6학년 학생이 22명으로 대다수인데, 6학년이 졸업해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학부모도 있다. 정원 30명보다 2명을 초과해서 수용하다 보니 교실에 남는 자리가 없다. 학생을 모집하지 못해 애를 먹는 일부 청소년 방과후 아카데미도 있지만, 양산은 오히려 반대다. 여기에는 양산시의 노력도 한몫한다. 양산시는 청소년 방과후 아카데미를 위탁이 아닌 시청 직영으로 운영한다. 직원들도 정규직이다.
▶학생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김수경 청소년지도사| 웅상 청소년 아카데미
동물학대 초점 맞춘 다큐 구상 중
“청소년 아카데미는 매칭 펀드 사업이에요. 경남도의 경우 여가부 기금 50%, 시비 35%, 도비 15%로 재정 100%를 맞추는데요. 저희는 양산시에서 원래 예정된 예산보다 연간 4000만~5000만 원을 더 받아요. 이곳이 양산에서도 교통이 불편하고 외곽에 있는데 원래 예산으로는 등·하원 버스를 운용할 수 없거든요. 예산이 늘어나니 등·하원 버스를 타고 아이들이 이곳에 오게 되죠.”(김준영 청소년지도사)
2011년 청소년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한 김준영 청소년지도사는 대학생 시절 야학에서 공부를 가르치며 이쪽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됐다. “함께 일하는 김수경 선생님과도 오래 아는 사이예요. 제가 부산에서 청소년지도사로 일할 때 청소년 심리상담 전공의 대학생이었던 김수경 선생님이 정기적으로 자원봉사를 왔어요. 워낙 열심이어서 같이 일하면 좋을 것 같았죠. 대학 졸업 이후에 양산으로 함께 지원해보자고 제안을 했어요. 청소년지도사는 사람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일을 하지만 특정 분야에 고도의 전문성을 가진 직업은 아니잖아요. 그러다 보니 더욱 전문성을 키우자는 말을 김수경 선생님에게 자주 해요. 김수경 선생님은 저녁 시간에 양산시 영상미디어센터에서 편집 수업을 따로 받고, 저는 전공이 역사라서 학생들과 탐방을 자주 다녀요. 그래야 더 좋은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으니까요.”
그가 부산의 청소년 아카데미에서 일할 때 만난 제자들은 아직도 양산으로 찾아와 안부를 묻는다. 제자들도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됐다. 김준영 청소년지도사가 결혼할 때도 제자들이 찾아와 축하 인사를 전했다. “예전 제자들이 양산까지 찾아오면 고맙기도 하지만 미안한 마음도 있어요. 그 친구들에게는 제가 여전히 20대 때의 선생님이겠지만 저는 매년 다른 아이들을 만나고 새로운 일에 집중하니까요. 그게 왠지 미안하더라고요.”
학생들은 여성가족부장관상과 함께 받은 상금 150만 원의 일부를 지역 동물보호소에 기부할 예정이다. 그는 벌써 내년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있다. “동물 학대에 초점을 맞추고 다큐멘터리를 만들까 생각 중이에요. 두 번째 해보고 싶은 것은 ‘논밭의 사계절’입니다. 근처에 있는 논을 하나 빌려서 1년 동안 아이들이랑 농부로 살아보는 거예요.”
일이 정말 재밌어서 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설렘이 있다. 2020년 프로그램을 설명하는 김준영 청소년지도사의 얼굴에도 아이 같은 설렘이 엿보였다.
박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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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