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 | 한겨레
-일본 정부가 수출규제 조치를 한 이유는 무엇인가?
=아베 정권 들어 일본 정부가 총리 중심으로 권력이 집중되면서 과거 다원적 민주주의가 위험해지고 있었다. 2018년 말부터 한일 문제를 어떻게 할지 총리 관저 주변에서 논의됐는데, 정책 결정 과정이 이들에 한정되면서 평소 치밀한 일본답지 않게 급하게 서두르는 모양으로 조치가 내려졌다. 우리에게 익숙한 일본답지 않은, 그러나 아베다운 조치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이 일본의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대상국)로 남으려면 엄격한 수출관리 체제 유지를 위한 국제적 협력에 충실히 응하라는 것이 이번 조치의 숨은 의도다. 결국 대북제재 유지를 강요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조치를 빌미로 국내 정치에 개입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일본 저강도 복합전술, 사안별 차분하게 대응을”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는 어떤 성격인가?
=수출규제 조치는 ‘저강도 복합전술’이다. 강도가 세지 않은 조치를 했기 때문에 이를 세게 보이기 위해 처음에 가장 핵심적인 품목 세 가지를 들고 나왔다고 본다. 엄밀히 말해 현재 일본의 대응 수준은 수출 금지나 규제가 아니라, 상징적인 심사 규제이므로 일종의 심리전이다. 다만 앞으로 상황 변화에 따라 일본이 지속적으로 비슷한 강도의 조치를 추가로 꺼낼 여지가 크다. 단일전술이 아니라 복합전술이라고 정의한 이유다. 한국 정부가 ‘고강도 단일전술’로 잘못 읽으면 안 된다.
-어떤 추가 조치를 내놓을 수 있을까?
=문재인정부의 대표 정책인 수소경제에 영향을 미치려 할 수 있다. 현재 한국 산업계는 수소경제를 위해 필요한 탄소섬유 전량을 일본에 의존하고 있다. 수소경제 대표 수혜자로 꼽히는 현대차의 경우, 수소탱크에 사용되는 탄소섬유를 일본 도레이에서 수입하고 있다. 도레이와 도호, 미쓰비시레이온 등 일본의 3개 업체는 세계 탄소섬유 생산량의 약 66%를 점유한다. 그 밖에 인공지능(AI), 로봇, 의료, 우주산업 등 4차 산업, 태양광 관련 산업을 아베 정부가 차후 조준할 가능성이 있다.
아베 정부가 향후 경제 조치에 더해 정치적 압박 조치도 병행할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대북제재 유지를 요구하며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를 견제해야 한다는 국제 여론전을 전개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당황하지 않고 대응하면 위기를 극복해서 오히려 기회로 만들어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시간에 쫓겨서 일본에 당장 무언가를 내놓아야 할 것처럼 얘기할 필요는 없다.
수출규제 국면에서 보인 일본의 논리 자체가 파탄 수준이다. 일본 정부가 우리에게 보낸 협의 요청 공문을 보면, 지금껏 그들의 한일청구권협정 해석에서도 벗어났음을 알 수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에 관한 대법원 판결을 두고 한국의 삼권분립을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는 거의 내정간섭에 해당하는 것으로 국제법 위반이다. 일본 정부가 배상 청구를 받은 일본 기업을 상대로 설명회를 열어 청구에 응하지 말라고 한 행위 역시 일본이 스스로 부정한 외교보호권을 실행한 사례다. 특히 A급 전범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한 것이야말로 일본이 국제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결정적 사례다. 한국 정부가 확전은 경계해야 하지만, 사안별로 분리해 차분하게 대응해나가면 된다.
“일본 안주해온 전후체제 변화 위기감”
-정부는 대응 방향을 어디에 맞춰야 하나?
=이번 사태의 계기가 된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를 둘러싼 일본의 공세에 한국 정부가 초점을 맞춰 적극 대응해야 한다. 우선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가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를 배경에 깔고 이에 대해 공세적으로 나오는 만큼, 한국 정부가 국제 여론전을 포함해 적극적으로 펴나갈 필요가 있다. 일본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3조(제3국 중재위 구성)에 따른 해결을 요구해온 데 대해 한국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를 일본과 국제사회에 설명해야 한다.
우리 대법원 판결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불법이라는 전제에서 일본 기업에 배상 의무가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일본은 배상 문제가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청구권협정은 배상과 관련이 없다. 배상 문제를 청구권협정에 따라 협의하자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이는 청구권협정 3조 규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일본 국민 상당수가 아베 정부의 수출규제 조치를 지지한다는데.
=일본 국민의 역사 인식이 후퇴하고 있다는 사실이 일본 정부가 수출규제에 나설 수 있었던 사회·경제적 배경이다. 전통적인 조선 멸시가 혐한론으로 불이 붙었고, 그것이 지금 일본 국가 지도자들의 이야기가 먹히는 배경이 된다. 또 양국 경제력 관련해서 부분적으로는 한국이 일본을 앞서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이 자신감을 갖던 산업 분야에서도 한국이 앞서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위기감을 느낀 것 같다.
?2018년 시작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서 일본은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비켜나 있었다. 일본이 그동안 안주해온 질서가 변한다는 위기감이 있었고, 트럼프의 미국은 믿지 못할 상대인 것 같은 상황에서 효과적인 대처 방법이 없다는 공포감이 형성됐다.
한반도를 평화와 협력의 무대로 만들어내는 새로운 질서가 ‘신한반도 체제’라면, 한반도 정전협정체제를 종식하려는 한국과 달리 한반도 정전협정체제를 전제로 성립한 동북아시아의 전략적 균형을 유지하려는 게 일본의 상황이다. 한반도 정전협정체제를 해석하는 역사적 층위의 불일치가 상호 불신을 증폭시켜오다 2018년 한일 관계에 위기를 가져온 것이다. 냉전과 남북분단으로 형성된 전후체제가 해체되는 상황에서 일본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니, 역설적으로 보면 일본 정부가 자신감을 상실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8월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광복회 전국 대의원협의회 주최로 열린 '일본 경제침략규탄 및 독립선열 후손들의 입장발표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한겨레
“극우 군국주의인 일본회의가 주도”
-2018년 10월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에 일본 정부가 민감한 이유는?
=2018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보며 일본이 막연한 불안감을 키우던 상황에서 대법원 판결이 위기의식을 갖게 했다. 일본이 편하게 지내온 전후체제가 붕괴하는 와중에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계기로 ‘65년 체제’를 뒤집는 논쟁이 촉발됐다. 65년 체제는 1965년 한일 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의 한계로 기초가 불안한 채 유지돼온 한일 관계를 말한다. 한일 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에서는 일제 식민지배가 불법인지 아닌지를 확인하지 못했다. 냉전 시기 한일 관계 개선을 통해 소련, 중국 포위망을 강화하려 한 미국의 압박과 일본으로부터 경제개발 자금을 타내려 한 박정희 정부의 의도가 작용해 과거사 문제에서 한일 간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진 탓이다. 이 때문에 식민지배 불법성 여부에 대한 양국의 견해차는 그대로 남게 됐다.
일본의 논리는 식민지배가 합법이므로 강제동원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며, 징용이 합법이라는 것이다. 반면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식민지배가 불법이므로 징용을 포함한 강제동원도 불법이라는 논리를 담고 있다. 이제 불일치했던 해석을 일치시키는 작업을 해야 한다. 당시에 문제를 봉합했던 당사자들조차 65년 체제가 한계를 안은 채 영구히 지속하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제사회에서도 서서히 식민지배를 불법으로 보고 있다. 일본도 2010년 간 나오토 담화에서는 식민지 지배가 한국 국민의 의사에 반해 이뤄진 것임을 인정했다. 일본이 이러한 역사 인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도록 이끄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럼으로써 65년 체제의 불안정성을 제거해야 한다.
-65년 체제의 불안정성을 어떻게 제거해야 하나?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신한반도 체제에 일본의 역할을 만들어줘야 한다. 이번 한일 관계 악화의 큰 배경에는 2018년부터 진행된 남북, 북미 간 신한반도 체제 구축 과정에서 일본이 배제돼온 상황이 있다. 지금 아베 정부는 1920년대 일본이 열강 사이에서 국제질서를 만들던 역할을 하고 싶어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을 배제하기보다는 한반도 변화에 일본을 끌어들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 정부가 북한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를 돕고 남북일 공동선언을 통해 새로운 한반도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새로운 100년을 위한 남북일 공동선언을 준비해야 한다. 또 한일 시민사회 협력이 좀 더 밀착돼야 한다.
-일본 시민사회와 어떻게 협력해야 하나?
=일본 시민사회에 대한 이해를 넓힐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전달되는 일본 시민사회의 모습은 평화주의자나 군국주의자 등 목소리 크고 자기 확신이 강한 양극단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일본 최대 규모 우익단체인 일본회의는 군국주의인데, 이런 사람들이 일본을 이끌어간다고 보는 것은 ‘태극기 부대’가 한국을 이끈다고 보는 것과 비슷하다. 사실 일본의 시민사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부류는 ‘평화헌법을 전제로 군사력 대신 국제사회의 규범과 제도 속에서 일본의 생존과 번영을 추구하되, 그것만으로는 안보가 보장되지 않으니 미일 동맹을 통해 생존을 보장받자’는 생각을 가진 제도적 현실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정치적 현실주의를 내걸고 군사적 보통국가로 변화를 주도하는 아베와 그 주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다. 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1+1’과는 별도의 트랙 형식 고민을”
-일본인 다수를 설득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일본인 다수를 설득하려면 일본이 그간 역사 인식에서 앞으로 나아간 지점에 주목해야 한다. 민주화 이후 과거사 문제를 여기까지 끌어올린 한국 시민사회의 힘도 확인할 겸 대다수 일본인을 설득하기 위해 일본의 역사 인식이 진전했다는 것도 일정 부분 인정하자. 위안부 문제에서 군의 관여를 인정한 1993년 고노 담화, 아시아 식민지배에 사죄와 반성을 표한 1995년 무라야마 담화, 한국 국민을 지칭해 사죄와 반성을 표한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한국 국민 의사에 반해 식민지배가 이뤄졌다는 인식을 표한 2010년 간 나오토 담화를 통해 역사 인식이 진전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조금만 더 가자는 식으로 독려해야 한다.
강제동원 문제에 일차적 책임은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에 있지만, 한국 정부와 한국 기업도 책임이 있다. 피해자 구제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한국 정부의 책임이기도 하다. 비록 부단한 독립운동을 전개했지만 외국의 강점 상태를 시정하지 못한 채 그 불법행위로 인해 자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있으며, 그 책임은 한국 정부로 귀속된다. 강제동원 피해자 구제를 한국 정부 책임하에 실시하는 것이야말로 임시정부 수립 100년째 해에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단절 없이 이어진 우리 법통을 확인할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한국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 구제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한국 정부가 ‘1+1 방안’(한국 기업과 일본 기업의 출연금으로 피해자 배상)을 내놓았으나 일본 정부는 ‘한국 책임론’(한국 정부와 한국 기업이 피해자 배상)을 제기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대법원 판결을 존중할 수밖에 없기에 ‘1+1’ 이상으로 여기에 한국 정부가 책임을 지는 방식을 취할 수는 없다. 따라서 ‘1+1’과는 별도의 트랙으로 한국 정부가 피해자 구제에 나서는 형식을 고민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일본 정부가 일본 기업에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에 문제를 제기해 일본 기업이 화해에 응하도록 길을 열 필요가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 개개인에게 돌아가야 할 청구권 자금을 기초로 성장한 우리 기업들 역시 이를 환원할 의무가 있다. 이들 기업이 자발적으로 나서 일본 기업에 참가를 유도해 기금을 만들어 대응한다면, 일본 정부가 책임을 받아들이는 여지가 생긴다.
글 원낙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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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