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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게티이미지

요즘은 사랑을 상징하는 음식으로 달콤한 초콜릿이나 사탕, 부드러운 생크림케이크를 떠올리지만 예전에는 대추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가을이면 붉게 익어가는 대추에는 사랑과 혼인 그리고 자손의 번성을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대추가 사랑의 과일이 된 것은 단맛 때문만은 아니다. 가지마다 알알이 빼곡하게 열매를 맺는 모습 때문이다. 대추나무는 꽃을 한꺼번에 피우지 않고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 개화기를 이어간다. 그만큼 많은 꽃을 피워내고 열매를 맺는다. 생명력도 강하다. 건조하거나 다소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고 한번 자리를 잡으면 해마다 열매를 선사한다. 예부터 대추나무가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여겨진 이유다.
혼인의 결실을 자손의 번성에서 찾았던 전통사회에서는 그 의미가 더욱 각별했다. 혼례를 치른 신부의 치마폭에 대추와 밤을 던지는 폐백 풍습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부부의 인연이 자손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대추에 담았다. 1990년대 인기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라는 제목에도 가족과 부부의 사랑을 대추나무에 빗댄 정서가 깃들어 있다.

친숙해서 과소평가된 과일
이토록 친숙한 과일이지만 대추만큼 오랫동안 과소평가된 과일도 드물다. 우리가 대추를 만나는 방식이 대부분 ‘건대추’였기 때문이다. 바짝 말린 대추 특유의 짙고 묵직한 향 때문에 약재를 떠올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심지어 삼계탕 속 대추를 먹어도 되는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질 정도다. 대추로서는 억울할 만한 일이다.
말리기 전 생대추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붉은빛이 돌기 시작한 생대추를 한입 베어 물면 먼저 진한 단맛이 퍼진다. 이어 풋사과를 떠올리게 하는 상큼함과 은은한 산미가 뒤따른다. 아삭하게 씹히는 식감도 일품이다. 한번 맛보면 ‘대추를 말려 먹는 게 맞나’ 하는 고민이 들 정도다.
하지만 대추를 말리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수확한 대추는 과육이 쉽게 물러 품질이 빠르게 떨어진다. 냉장·유통 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지금보다 더 보관이 쉽지 않았다. 대추를 가장 오래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말리는 것이었다. 수분을 빼면 저장성이 높아지고 단맛과 향이 농축된다. 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만나는 건대추는 그렇게 탄생했다.

오랜 세월 이은 대추의 저력
한반도에서 대추를 먹은 역사는 상당히 오래됐다. 1세기 무렵 편찬된 중국의 역사서 ‘한서(漢書)’에는 낙랑에서 대추와 밤이 난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다만 이 기록만으로 당시 사람들이 대추를 얼마나 일상적으로 먹었는지까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대추가 오래전부터 귀하게 쓰였다는 점이다. 특히 설탕이나 꿀처럼 단맛을 내는 재료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에 대추는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달콤한 식재료였다. 생으로 먹기도 하고 말렸다가 필요할 때 꺼내 먹을 수도 있었다. 차와 떡, 한과, 약식은 물론 각종 탕과 음식에도 넣었다. 달면서도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장점 덕분에 대추는 계절을 초월하는 과일이었다.
영양학적으로도 대추는 알차다. 식이섬유와 칼륨을 비롯해 비타민과 폴리페놀 등 다양한 성분을 함유하고 있다. 폴리페놀과 플라보노이드 같은 식물성 화합물은 항산화 작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식이섬유는 배변활동과 장 건강에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칼륨은 정상적인 체액 균형과 혈압 유지에 필요한 영양소다.
삼계탕 속 대추 역시 이런 대추의 쓰임을 보여주는 한 예다. 삼계탕이 현대적인 보양식으로 자리 잡던 시기, 인삼과 대추는 모두 몸을 보하는 음식이라는 인식 속에서 닭 속에 함께 들어갔다. 닭과 인삼을 중심으로 한 음식에 대추와 찹쌀, 마늘 등이 더해지면서 오늘날 우리가 익숙한 삼계탕의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대추는 주인공으로 내세워지는 과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약재가 되기도 했고, 제사상에 오르기도 했고, 삼계탕 속에서 은근한 단맛을 보태기도 했다.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오랜 세월 우리 곁에 머물렀다. 올가을 붉게 익은 대추를 만난다면 그냥 지나치지 말자. 작고 둥근 대추 한 알에는 오랜 세월 이어온 삶의 지혜와 자연의 시간이 오롯이 담겨 있다.

채상우
먹는 게 좋아 미식을 좇는 일간지 기자. ‘헤럴드경제’에 ‘맛있는 이야기 미담:味談’을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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