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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대한민국 지식인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오랜 과녁이었다. 1990년대 우루과이라운드(UR) 타결이 가져온 농산물 시장 개방의 충격부터 2000년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둘러싼 국론 분열과 소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 그리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르기까지, 세계화는 늘 불평등과 양극화를 심화하는 원인으로 지목됐다. 이러한 비판적 기류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 경제권에서 촉발된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운동을 목격하고 나서는 일종의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정신이자 보편적 상식으로 자리 잡는 듯했다. 도덕적 명분은 늘 세계화를 공격하는 자에게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자본주의에 대한 사상적·문화적 비판이 정점에 달했던 때조차도 국제경제 네트워크의 이면에서는 전혀 다른 역사의 반전이 조용하지만 심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비판가들이 선진국 중하층 계급의 소득 정체와 일자리 상실에서 증거를 찾고 있을 때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신흥 경제국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깔아놓은 글로벌 공급망 위를 질주하며 폭발적인 부의 축적을 이뤄냈다.

글로벌 가치사슬의 재편
미국의 경제학자 브랑코 밀라노비치가 예리하게 통찰했듯, 세계화를 견인했던 코스모폴리타니즘과 경쟁이라는 ‘미덕’이 서구 선진국 내부에서 경제적 양극화와 정치적 파국을 잉태했더라도, 아시아는 이를 통해 빈곤을 탈출하고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한 경쟁적 세계화의 최대 수혜자였다. 지식인들이 세계화의 그림자를 비판하는 동안 대한민국은 그 세계화의 가장 밝은 빛을 따라 선진국 반열에 들어선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물론 코로나19 팬데믹과 연이은 지정학적 충돌을 관통하며 세계는 또 한 번 격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선진민주주의 국가들 내부에 누적된 대중의 불만은 포퓰리즘과 권위주의의 부상을 낳았고 시장 통합을 주도하던 서구 리더십은 급격히 붕괴했다. 이제 미국과 유럽 등 주요 선진국은 과거 자신들이 설파하던 개방형 자유무역 기조를 내던지고 막대한 국가보조금과 노골적인 자국우선주의를 앞세운 ‘신중상주의(Neo-Mercantilism)’ 요새로 숨어들며 관세 장벽을 높이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수사와 정책적 급선회만 보면 신자유주의 질서와 세계화는 완전히 사망선고를 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관념적 ‘착시’다. 표면적인 정치 지형의 변화와 달리 실물경제를 떠받치는 거대한 분업 네트워크는 결코 해체되지 않았다. 신임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는 오래전부터 ‘글로벌 가치사슬’의 재편 양상을 실증적으로 추적하며 날카롭게 지적해왔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최근 세계화의 네트워크가 단절되거나 고립된 블록으로 쪼개졌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지정학적 마찰을 우회하기 위해 공급망의 단계가 다변화하고 그 길이가 더욱 길고 복잡하게 진화하고 있을 뿐이다. 전 세계 기업이 수십 년간 고도화해온 비용 효율성과 분업 체제의 진화는 정치인의 선언 몇 마디로 거스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계화는 깨지지 않았다, 더 정교해졌을 뿐
이 냉엄한 실증적 현실이 수출 주도형 국가인 한국의 경제에 던지는 뜻은 자명하다. 세계화가 퇴조한다는 섣부른 비관론에 휩쓸리거나 국내적 자급자족의 환상에 빠질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더욱 복잡하게 얽히는 글로벌 경제의 거미줄 속에서 우리가 차지해야 할 대체 불가능한 핵심 위치를 지속적으로 차지하고 지켜내야 한다.
오늘날 우리 손에 쥐어진 생존과 도약의 핵심 수단은 ‘반도체’와 ‘K-컬처’다. 반도체는 강대국의 거친 신중상주의적 배타성 속에서도 결코 한국을 글로벌 공급망에서 함부로 도려낼 수 없게 만드는 ‘기술적 방패’이자 레버리지다.
K-컬처로 대변되는 문화적 매력도는 국경과 관세 장벽을 유연하게 뛰어넘어 전 세계 소비자를 한국이라는 거대한 취향의 네트워크로 묶어내는 ‘소프트파워 강화제’다. 이 두 가지 축은 글로벌 연결망상에서 한국이 20세기의 단순한 하청 기지에서 21세기의 대체 불가한 허브로 도약하면서 만들어낸 공간의 핵심이다.
수출 통상으로 생존해온 대한민국에 세계화와 자유교역이 선택 사항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우리가 기적을 써내려간 과거의 필연적 숙명이었으며 보호무역의 광풍이 몰아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사활을 걸고 버텨내야 할 생존의 조건이다. 세계화는 깨지지 않았다. 다만 그 위에서 벌어지는 게임의 룰이 가혹한 방식으로 정교해졌을 뿐이다. 재편되는 네트워크의 길목을 정확히 읽어내고 그 위에 올라타야 지난 성취의 역사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이원재
이원재
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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