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 대전환
바야흐로 인공지능(AI) 대전환의 시대입니다. AI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기술·산업뿐 아니라 과학·예술·일상의 영역까지 파고들어 세상을 뒤바꾸고 있습니다. 불과 3~4년 전만 해도 AI는 ‘언젠가 올 미래 기술’처럼 여겨졌지만 이제 AI는 이미 현실 판단과 결정 과정에 직접 개입하는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수학·과학 난제도 AI가 단숨에 풀어내는 것은 기본이고 병원에선 이제 주요 수술도 질병 진단도 AI가 보조합니다. 제약·바이오 기업들은 신약 개발 과정에 AI를 투입해 후보물질 탐색과 설계 속도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콘텐츠와 예술 분야에서도 AI는 더 이상 도구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음악과 그림, 영상과 글을 함께 만들어내는 새로운 창작 파트너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AI는 더 이상 특정 기업이나 서비스의 문제가 아니라 한 나라의 경쟁력과 미래를 좌우하는 핵심 인프라가 되고 있습니다. AI 경쟁이 단순 기업 간 경쟁을 넘어 나라와 나라가 맞붙는 경쟁으로 인식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AI 패권’ 찾기에 나선 까닭
우리 정부는 최근 한국의 독자 AI 파운데이션을 확립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2030년까지 한국형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일명 ‘독파모’), 즉 ‘K-인공지능’을 만들겠다는 구상입니다. 한국은 현재 오픈AI의 ‘챗GPT’ 매출이 미국 다음으로 많은 나라입니다(2025년 11월 기준). 우리나라 소비자 4명 중 3명은 평균 2.2개의 AI 서비스를 이용해본 적 있다는 조사도 있습니다.
정부는 우리나라 국민이 누구나 쓸 수 있는 AI는 물론이고 전 세계 어디에서도 가장 우수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AI 파운데이션 모델을 내놓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파운데이션 모델은 AI의 기초 두뇌에 해당합니다. 사람으로 치면 기초적인 사고 능력을 담당하는 뇌와 같습니다. 이 기반 위에 대화형 AI, 의료 AI, 교육 AI 같은 다양한 서비스가 만들어집니다.
최근 AI 개발이 전 세계적으로 급속히 빨라지면서 그만큼 AI 주도권도 중요해졌는데요. AI 주권을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해외 기업에 뺏긴다면 경제나 안보도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습니다. AI 주도권을 미국이나 중국에 뺏기지 않고 자립하는 것을 넘어 전 세계에 우리 주도로 만든 AI를 보급하고 이를 통해 ‘소버린(Sovereign·주권) AI’ 개발에 성공하겠다는 계획입니다.
소버린 AI란 외국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각 나라나 지역에서 개발하는 AI를 말합니다. 챗GPT 같은 영어·서구권 문화 중심의 AI는 아무래도 미국 중심의 가치관과 사회관을 학습하게 됩니다. 이용자에게 미국 중심적인 답변을 내놓을 가능성도 그만큼 커집니다. 많은 AI 관련 연구에선 AI가 아직 유색인종이나 아시아인종 이미지를 백인보다 잘 인식하지 못하거나 잘못 인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역시 서구권 문화 중심으로 AI가 개발됐기 때문일 겁니다. 각 나라 상황에 맞는 AI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영국 언론사 ‘토터스 미디어’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 AI 지수’에 따르면 한국의 AI 기술력은 세계 6위(2024년 기준) 수준으로 1·2위 미국·중국과 비교하면 격차가 큽니다. ‘AI 기술 종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스스로 한국 문화와 사회, 역사를 제대로 학습한 AI 모델을 만들어 전 세계에 보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단순히 한국에서 어느 정도 쓸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든 모두의 AI가 아니라 해외 기업이나 해외 이용자들이 쓸 수 있는 글로벌 수준의 AI를 만드는 게 목표”라는 것이 정부의 설명입니다.
2030년까지 ‘K-인공지능’ 만든다
그렇다면 K-인공지능, 한국형 독자 AI 모델은 어떻게 만들까요? 정부는 ‘2030년까지 AI 3대 강국’을 핵심 국정과제로 내걸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첫 번째 사업으로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국형 독자 AI의 핵심 기술을 우리 기술로 직접 만드는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입니다. 이를 통해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AI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는 무기를 확보하겠다는 것이죠. 이를 위해 현재 정예 팀으로 선발된 기업 컨소시엄은 총 5개 팀입니다. ▲LG AI 연구원 ▲네이버클라우드 ▲NC AI ▲SK텔레콤 ▲업스테이지(알파벳 순) 등입니다. 처음 프로젝트 공모에 참여했던 15개 팀 중 서면·발표 평가를 거쳐 5개 팀을 뽑았습니다.
정부는 먼저 한국형 AI 생태계가 조성될 수 있도록 이들 국가대표 AI 기업 컨소시엄 5개 팀에 2027년까지 2136억 원가량을 지원한다는 계획입니다. 또한 그래픽처리장치(GPU) 지원, AI 학습에 필요한 데이터 확보, 인재 채용 지원에도 예산을 적극 지원합니다. 이를 통해 오픈AI를 포함한 전 세계 프런티어급 AI의 95%까지 기술 수준을 끌어올린 ‘K-인공지능’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AI를 만들려면 GPU도 중요하지만 고품질 데이터도 필요합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이에 국가기록원·국사편찬위원회 등 공공 데이터를 공동 구매해 제공한다는 방침입니다.

5개 선발 기업 ‘초경쟁’
선발 기업 간 경쟁도 치열합니다. 5개 모델이 모두 최종 ‘독파모’, ‘K-인공지능’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6개월 단위로 평가를 거쳐 1개 팀씩 떨어뜨리고 이를 통해 2027년 상반기까지 최종 1~2개 팀만 추려낸다는 방침입니다. 1차 평가는 2026년 1월 15일 이전, 2차 평가는 2026년 6월쯤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2차 평가에서 나오는 결과물은 글로벌 ‘톱 10’에 드는 수준의 AI 파운데이션 모델이 목표입니다. 최종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는 정예 팀은 AI 모델 고도화에 필요한 컴퓨팅 자원과 데이터 구축·가공 비용, 해외 우수 연구자 인건비, 연구비 연간 20억 원가량 등을 지원받게 됩니다.
기업들은 각자 자존심과 사활을 걸고 숨막히는 각축전에 돌입했습니다. 최종 1~2개 팀에 선정될 때까지 피 말리는 기술 경쟁을 펼쳐야 하는 것이죠.
먼저 LG AI연구원은 이미 글로벌 성능 지표에서 최상위권을 기록하고 있는 자사 AI 모델 ‘엑사원(EXAONE) 4.0’을 필두로 전문성과 범용성을 결합한 ‘전문가 AI’를 내놓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국내외 산업 생태계 전반에 적용 가능한 고성능 모델을 개발한다는 계획입니다.
네이버클라우드는 자사 AI 모델인 ‘하이퍼클로바X’로 선보였던 검증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국어에 가장 최적화된 모델을 선보인다는 계획입니다. 특히 중동과 동남아시아 등 글로벌 시장으로까지 진출할 수 있는 글로벌 AI 모델을 만드는 한편 국민이 직접 체감할 수 있는 범용 서비스를 지향합니다.
NC AI는 게임산업에서 쌓은 독보적인 AI 기술을 바탕으로 언어와 문화에 특화된 모델을 개발합니다. 특히 2000억 개 이상의 매개변수(200B) 규모를 갖춘 모델을 통해 미디어, 제조, 금융 등 다양한 산업과의 융합을 꾀합니다.
SK텔레콤은 텍스트를 넘어 이미지, 영상, 음성을 통합 처리하는 ‘옴니모달(Omni-modal)’ 기술에 집중합니다. 또한 국산 AI 반도체를 활용해 빠르고 효율적인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국민의 일상을 돕는 ‘AI 에이전트 서비스’에 강점을 둡니다. AI 비서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업스테이지는 정예 팀 중 유일한 스타트업 기업입니다. 가볍지만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AI, 산업 특화 AI에 특히 강점이 있습니다. 법률, 의료, 금융 등 보안이 중요한 전문 분야에서 즉시 사용 가능한 AI를 구축해 3년 내 1000만 사용자를 확보한다는 전략입니다.
‘국가대표 AI’ 첫 대국민 프레젠테이션
‘대국민 프레젠테이션’도 열렸습니다. 2025년 12월 30일 서울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열린 1차 ‘대국민 프레젠테이션’에서 정예 기업 5곳이 지난 6개월 동안 개발한 1차 성과물을 국민들 앞에서 선보였습니다.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하정우 청와대 AI미래기획수석을 비롯해 5개 정예기업 관계자들이 정부 주요 인사들과 참석했습니다. 일반 참가자도 1000여 명이나 몰렸습니다. 발표회 티켓이 시중에 공개되자마자 빠르게 마감될 정도로 인기였다고 합니다.
이날 배 부총리는 환영사에서 “우리가 독자 AI(인공지능) 파운데이션 모델을 만드는 과정은 미국, 중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도 주목하고 있다”며 “AI 3대 강국이 되기 위한 첫 관문으로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같은 날 해당 기업들은 행사장 로비에 ‘AI 체험 부스’를 마련했습니다. 5개 정예기업이 만든 AI 모델을 직접 경험하려는 이들이 북적이면서 체험 부스마다 긴 줄이 늘어선 풍경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정부는 2026년 1월 중 1차 단계 평가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비서처럼 쓸 수 있는 ‘만인을 위한 AI 모델’, 우리말에 가장 최적화돼 있고, 한국 문화와 사회·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가장 한국적인 AI 모델’, 동시에 전 세계 어떤 AI 모델과 경쟁해도 뒤지지 않을 혁신적인 문제 해결력을 지닌 ‘글로벌 프런티어급 AI 모델’을 만들겠다는 꿈은 곧 실현될 수 있을까요. 사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K-팝, K-푸드, K-컬처가 세상을 석권하는 날이 올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죠. K-인공지능이 전 세계 AI 패권을 휘어잡는 날도 그렇게 다가오길 기대해봅니다.
송혜진 조선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