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4월 27일 오후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문에 서명 후 서로 손을 잡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악몽 같던 기운이 평화의 봄바람으로 바뀌었다. 문재인정부 출범 뒤 한반도 정세의 변화를 말한다. 2월 27~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진행된 2차 북미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비핵화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진 모습이다. 남북 관계도 2개월여 동안 특별한 진전이 없다. 하지만 숨 가쁘게 흘러온 변화의 물결이 잠시 주춤하는 것일 뿐 다시 악몽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은 4·27 판문점 선언 1주년 기념사에서 “우리는 되돌릴 수 없는 평화, 함께 잘 사는 한반도를 반드시 만날 것”이라며 “때로는 만나게 되는 난관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함께 길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2년 전을 돌이켜보면 한반도는 전쟁 위험이 짙어가는 파국으로 치닫는 듯했다. 핵 능력 완성을 목표로 하는 북한의 도발과 이에 대응한 국제사회의 제재와 압박이 강화되면서 긴장은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남북 관계는 2016년 2월 개성공단 폐쇄 이후 우발적 군사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연락 채널조차 단절된 상태였다. 북한은 2017년 2월부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를 시작한 뒤 11월 29일 ‘화성 15형’ 발사를 끝으로 핵 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이런 엄중한 상황에서 문재인정부는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제재와 압박 일변도에서 대화와 제재를 병행한다는 원칙을 세우는 한편,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로 가는 길을 먼저 제시했다.
▶판문점 선언 1주년인 4월 27일 오후 경기 파주 임진각 민통선에서 열린 비무장지대(DMZ) 평화손잡기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북쪽을 바라보며 줄지어 인간띠를 만들고 있다.│한겨레
이산가족 상봉 재개, 교류협력 급증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두 달 만인 2017년 7월 독일 쾨르버재단 연설을 통해 밝힌 베를린 선언은 새로운 남북 관계를 예고했다. 베를린 선언에는 한반도 평화 실현을 위한 5대 원칙을 담았다. 한반도 평화 정착, 한반도 비핵화, 남북 문제의 주도적 해결,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북한 도발에 대한 단호한 대응이 그것이다. 그해 8월 광복절 경축사, 11월 국회 시정연설 등 계기가 주어질 때마다 한반도 전쟁 위험의 해소와 평화 구축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문 대통령은 또 “언제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날 용의가 있다”는 뜻도 밝혔다. 이듬해인 2018년 첫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신년사를 통해 넌지시 화답을 던졌다. 남북고위급 회담과 평창동계올림픽 참가 의사를 내비친 것이다. 이에 따라 평창동계올림픽은 전 세계의 축복 속에 남북 선수단이 함께 어우러진 ‘평화 올림픽’으로 열렸고, 이후 세 번의 남북정상회담과 두 번의 북미정상회담으로 가는 물꼬를 텄다.
세 차례 남북 정상회담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체제로 가는 길을 제시했다. 전면적이고 획기적인 남북 관계 개선과 군사적 긴장 해소에도 합의했다. 남북 대화와 교류협력의 활성화로 성과가 이어졌다. 2017년에는 단 한 번도 없었던 남북 당국자 간 대화가 2018년엔 고위급 회담, 분야별 회담 등이 36차례나 열려 모두 23건의 합의서 또는 공동 보도문이 나왔다. 2018년 9월 개성공단 내에 문을 연 남북공동연락사무소는 다방면의 협력과 교류, 왕래와 접촉을 보장하기 위한 상시 협의 창구로 활용되고 있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2018년 8월 3년 만에 재개했고, 앞으로 화상 상봉과 영상편지 추진에도 합의했다. 지방자치단체와 민간 차원의 다양한 교류협력 사업도 크게 늘었다. 통일부 집계에 따르면, 남과 북을 오간 왕래 인원수는 2017년 115명에서 2018년 7163명으로 급증했다.
남북 공동대응이 필요한 산림·보건 분야 협력 기반 사업과 철도·도로, 공동특구 등 경제협력 사업의 여건 조성을 위한 노력은 유엔의 대북제재 틀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도 조심스럽게 진행되고 있다. 북한 지역 산림 생태계 보호·복원을 위한 협력, 남북 간 전염병 정보교환·공동대응 체계 구축, 소나무재선충병 공동방제,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도로 공동조사 및 착공식 개최 등이 지금까지 이룬 주요 성과다. 군사분계선 일대에서도 화해의 바람이 퍼졌다. 군사당국은 전방부대에 설치된 대북, 대남 확성기를 모두 치웠고 지상과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 행위를 전면 중지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의 지뢰 제거와 비무장화, 비무장지대(DMZ) 감시초소(GP) 시범철수를 완료했고, 1953년 정전협정 이후 처음으로 한강(임진강) 하구 공동이용 수역에 대한 공동수로 조사도 마무리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견학이 재개된 5월 1일 오전 안보견학을 온 관광객들이 2018년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친교산책 후 대화를 나눈 도보다리를 견학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으로 활로
순풍이 불던 남북 관계는 제재 해제와 비핵화 조치를 놓고 공방을 벌이던 북·미가 하노이에서 합의에 실패하며 먹구름에 갇혀 있다. 북·미 간 교착상태가 장기화하면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도 추동력이 떨어질 수 있다. 정부는 북핵 문제의 당사자이면서 한반도 평화의 촉진자로서 고차방정식의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우선 남북 대화와 교류협력의 안정적이고 꾸준한 추진으로 북한의 실질적인 비핵화 조치를 유도한다는 게 정부의 계획이다. 이를 통해 북·미 간 협상 촉진의 선순환 여건이 마련될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은 대북정책이나 북·미 협상의 촉진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좀 더 포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이런 판단에 따라 나온 게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이다.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은 남북 관계 개선과 경제협력의 활성화를 통해 북한의 경제 발전과 변화를 견인하는 동시에 우리 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나아가 동북아 지역 평화경제 공동체를 일군다는 원대한 꿈이다.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은 신북방정책과 신남방정책이라는 대외정책과 짝을 이뤄 추진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제3차 동방경제포럼 기조연설을 통해 밝힌 신북방정책은 극동 지역 경제협력을 매개로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촉진하자는 전략이다. 러시아 극동 지역과 중국 동북 3성, 중앙아시아와 몽골 등 유라시아 지역 국가들과의 경제협력을 활성화하는 게 1차 목표다. 특히 신동방정책을 펴고 있는 러시아와 협력 논의가 활발하다. 문 대통령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두 차례 정상회담을 통해 유라시아경제연합(EAEU)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추진과 함께, 가스·철도·항만·전력·북극항로·조선·일자리·농업·수산 등 9개 분야에서 동시다발적 협력을 추진하는 ‘9개 다리 행동계획’을 합의했다. 남·북·러 3각 협력을 위한 전력·가스 분야 공동연구, 한·러 지방협력 포럼 출범 등 후속 작업도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4월 16~23일 중앙아시아 3개국(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순방을 통해 24개 프로젝트, 130억 달러에 이르는 경제협력 사업에 합의하기도 했다. 아울러 한반도 평화 프로젝트에 대한 이들 국가의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성과도 거뒀다. 한반도의 북방 유라시아는 새로운 번영의 중심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 지역에서 경제협력 사업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이면 북한도 여기에 자연스럽게 동참하려는 유인이 생긴다는 게 정부의 기대다. 북한이 핵 없이도 평화롭게 번영할 수 있는 길을 한국의 신북방정책이 열어주는 셈이다. 거꾸로 남북 관계의 진전으로 한반도에 대한 투자와 사업의 위험 요소가 줄어들면 신동방정책이 더욱 탄력을 받을 수도 있다.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집 앞에서 열린 판문점 선언 1주년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특별 메세지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한·아세안 정상회의 김 위원장 초청 거론
신남방정책은 한반도 남쪽 바다를 넘어 아세안(ASEAN: 동남아시아국가연합) 10개국과 인도와의 경제적 협력관계를 한반도 주변 4강 수준으로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대외정책이다. 신남방정책의 대상 국가들은 인구수가 약 20억 명에 이르는 거대한 시장이면서 풍부한 자원과 빠른 중산층 증가로 성장 잠재력이 크다. 문재인정부는 100대 국정과제의 하나로 신남방정책을 채택했다. 이어 대상 국가들과의 정상회담과 고위급 회담을 잇따라 진행해 미래 새로운 경제공동체의 실현을 구체화하고 있다.
2018년 8월에는 신남방정책특별위원회를 출범해 세부 추진전략과 과제를 짜고 민관 공동으로 실행 단위도 다양하게 구축하고 있다. 추진전략의 핵심은 ‘사람(People)·평화(Peace)·상생 번영(Prosperity)의 공동체’라는 뜻을 담은 ‘3P’ 개념을 바탕으로 상품 교역 중심에서 기술과 문화·예술, 인적 교류로 협력 영역을 넓히자는 것이다. 기후변화 대응과 재난 예방, 안보 차원의 협력 논의도 진행된다.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정착에 대한 지지, 북한이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도록 지원하기 위한 협력 방안 등이 지금까지 아세안 국가 정상들과의 회담에서 단골 메뉴로 올라갔다. 11월 부산에서 열리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초청하는 방안도 조심스럽게 거론된다. 현재 북한은 아세안 10개 나라와 모두 공식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아세안 차원의 개입 방안이 충분히 논의될 수 있다.
국민 소통과 참여로 정책 채워나가야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문재인정부의 대북정책과 대외정책에는 역대 정부들처럼 차별화된 명칭이 붙지 않는다. 남북 간 신뢰와 상호 존중을 기반으로 한 평화를 최우선 가치로 추구할 뿐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비전과 방향이다. 문제는 이에 맞는 남북 간 합의가 도출되더라도 이행할 수 있는 토대가 취약하다는 데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북정책의 기조와 방향이 바뀌고 남북 간 합의는 지켜지지 않아 남북 관계는 전진과 후퇴를 반복해왔다. 폭넓은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는 게 선결과제다. 국민과의 끊임없는 소통과 국민적 참여로 정책의 구체적인 내용을 채워나가야 한다.
남북 관계는 남북 당국 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현실도 무시할 수 없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이해관계가 얽힌 주변 국가들과의 긴밀한 연계 속에서 풀어나가야 한다. 직접 당사자인 우리가 주도하면서도 개방적인 태도로 국제사회와의 협력체제를 구축해야 정책의 일관성과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 대립과 갈등 구조는 전쟁이 잠정적으로 중단된 상태인 정전체제의 산물이다. 여기에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까지 겹치면서 한반도 정세는 장기간 불확실성과 악순환 늪에 빠져들었다. 여기에서 벗어나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멀고 험난한 길이 남아 있다. 그러나 반드시 함께 가야 할 길이다.
박순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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