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하던 대로 아침에 집에서 나와 산을 향한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길이 살포시 얼었다. 하지만 앞서 올라간 사람들 발자국 덕에 그런대로 오를 만했다. 길 양쪽에는 새해를 앞두고 매단 청사초롱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며칠 후면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새해 첫날이다. 아마도 밤에 청사초롱마다 불을 켜놓고 길을 밝힐 모양이다.
예나 지금이나 축제에는 불이 빠질 수 없다. 아득한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한 올림픽은 지금도 태양의 신으로부터 불을 받아 세계 구석구석을 누비며 사람들의 시선을 축제로 이끈다. 어릴 때 마을의 크고 작은 잔치 때마다 불은 어둠을 밝혀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켰고, 정월대보름에는 쥐불놀이를 하며 마을마다 불의 꽃밭을 만들기도 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청사초롱 따라 팔각정을 지나 조금 올라가니, 몇 년 전에 세워진 아담한 돌비석이 가슴에 ‘새해에는 모든 소망 이루소서’라는 글씨를 새긴 채 서 있다. 해마다 새해 첫날이면 이곳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산을 찾는 모든 사람의 안녕을 기원한다. 며칠 후 새해 첫날이 되는 새벽에도 산신제와 해맞이 행사가 벌어질 것이다. 새해를 맞으러 온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저 멀리 산봉우리 사이로 둥근 해가 떠오르면 저마다 가슴에 품은 소망을 빌 것이다. 나는 이번에 무슨 소망을 빌까? 늘 하던 대로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빌고, 하는 일이 잘되길 기원하겠지.
사실 몇 년 동안 나는 몹시 지쳐 있었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주변에 있는 가까운 이들 덕분이리라. 꽤 오래전에 읽은 류시화 씨의 <지구별 여행자> 중에서 내 마음을 위로해주던 글이 생각난다. ‘원숭이가 공을 떨어뜨린 곳에서 다시 시작하라.’ 내용은 이렇다. 인도가 영국 식민지였을 때다. 인도에 파견된 영국인들은 여가를 즐기려 골프를 치기 시작한다. 그런데 원숭이 떼의 등장으로 문제가 생긴다. 그들은 골프공이 그린에 떨어지면 재빨리 물고 달아나기도 하고, 엉뚱한 곳으로 옮겨놓는다. 하는 수 없이 골프 치는 사람들은 규칙을 하나 만든다. 원숭이가 공을 떨어뜨린 그 자리에서 경기를 진행하는 것. 그렇게 하니 그린에서는 엉뚱한 일이 벌어진다. 뜻밖에 홀컵 근처에 떨어진 공을 원숭이들이 멀리 옮겨놓거나 물속으로 집어던지는 바람에 손해를 보는 사람도 있고, 엉뚱한 곳에 떨어진 공을 홀컵 가까이 던져놓는 바람에 이익을 보는 사람이 나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비단 골프뿐이겠는가? 사람들의 삶도 그렇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계속 산길을 오른다. 산은 언제나 똑같은 모습으로 그곳에 우뚝 서 있는데, 내게는 늘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야 산에 오를 때마다 바뀌는 내 마음 탓일 게다. 이제 며칠 있으면 시간은 시곗바늘을 째깍째깍 돌며 ‘새해’를 우리 앞에 가져다 놓을 것이다. 무심한 시계는 늘 같은 속도로 변함없이 돌며 오늘이거나 내일이거나 올해이거나 내년이거나 구분 없이 흐르건만, 사람들은 굳이 그걸 오늘과 내일, 올해와 새해로 구분한다. 하기야 필요하면 마디를 두고, 풀어야 할 매듭이 있으면 풀고, 맺어야 할 게 있다면 다시 맺어야겠지. 이런 마디를 계기로 버릴 것이 있으면 버리고, 다짐할 것이 있으면 다짐하고, 새로 계획한 것이 있다면 해도 좋으리. 그래, 많은 것을 바라지 말자. 더 이상 내 현실이 힘들다고 생각하지 말자.
이진호 강원 원주시 무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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