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희(1130~1200)는 중국 송나라 때의 철학자이다. 신유학을 집대성해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철학을 정립했다. 성리학이란 말은 ‘성즉리’에서 왔다. 성즉리란 인간의 본성에는 우주 만물의 근본적 이치가 담겨 있다는 말이다. 인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말이다.
성리학은 12세기 말에서 19세기 말까지, 약 700년 동안 동아시아에서 지배적인 철학이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인물을 꼽으라면 공자 다음으로 주희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공자는 여전히 칭송의 대상이지만, 주희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 있다. 아마도 역사적 경험 때문일 것이다.
조선에서 성리학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자, 당연히 성리학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성리학을 추종하다 보니 시대 변화에 뒤처졌고, 국력이 약화되어 식민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일제의 침략을 받았을 때 보여준 성리학자들의 태도 또한 문제였다. 일제에 저항했던 성리학자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일제에 맞서지 않고 은거했다. 물론 성리학자는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지 투쟁을 능사로 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울 때 뒤로 물러남으로써 성리학에 대한 불신을 더욱 키웠다. 사회 지도층이었던 성리학자들의 그런 태도는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어용학자들은 성리학을 공리공론이라고 했다.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의 후진성을 부각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성리학을 공리공론이라고 하는 생각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아마도 성리학의 핵심 개념인 ‘리(理)’와 ‘기(氣)’를 현실과 동떨어진 개념으로 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공리공론이라면 어떻게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의문이다. 일본에서도 도쿠가와 바쿠후 때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공리공론을 열심히 받아들인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하다.
성리학이 왕권 강화를 위한 사상이었다는 생각은 일면적이다. 오히려 성리학은 초기에 탄압을 받았다. 임금의 전제적 권력을 견제하려 했기 때문이다. 주희는 임금일지라도 특별한 존재가 아니므로, 평상시에는 학자들의 지도를 받아 수양을 해야 하고, 정치를 할 때는 신하들과 함께 의논해야 한다고 했다.
성리학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은 ‘사대부’가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역사책이나 역사극에 흔히 등장하는 사대부란 어떤 존재인가. 사대부는 송나라 때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즉, 사대부는 시대적 산물이었다.
당나라와 송나라 때를 한데 묶어 ‘당송 변혁기’라고 한다. 이 시기에 사회가 급격히 변화했다. 755년(당나라 현종 44년)에 일어난 ‘안사의 난’이 시발점이었다. 안록산과 사사명이 일으킨 난으로 인해 9년 동안 당나라에서는 내전이 일어났다.
안사의 난은 당나라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흔들어놓았다. 지배층이었던 귀족이 몰락했다. 상당수의 귀족들이 살해당했고, 살아남은 귀족들도 예전의 지위를 회복할 수 없었다. 또한 오랫동안의 내전으로 경제 시스템이 붕괴했다.
안사의 난이 끝난 직후, 당나라 정부는 어려워진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세제개편을 단행했다. 그 개편은 경제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실질적으로 포기한 것이었다. 특기할 점은 토지에 대한 정부 통제가 폐기되었다는 것이다. 토지거래가 자유로워졌고, 11세기에 이르면 전체 토지의 95%를 개인들이 소유하게 되었다. 그런 변화 속에서 신흥지주층이 생겨났다. 그 신흥지주층에서 사대부가 나왔다.
당나라를 이어 등장한 송나라는 과거제도를 정비했다. 과거제도는 수나라 때부터 실시되었지만 공정성이 없어 주로 귀족의 자제들이 합격했다. 송나라 정부는 과거시험의 공정성을 제고해 신분에 관계없이 합격자가 나올 수 있게 했다. 이렇게 되자 평민들 사이에서 과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평민 중 신흥지주층에서 과거 응시자가 많이 나온 것은 당연했다. 과거에 응시하려면 상당 기간 공부를 할 수 있는 재산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때 과거에 합격했거나 과거 준비를 하는 사람들을 사대부라고 했다. 사대부란 신분이 아니라 스스로 실력을 쌓아 신분 상승을 꾀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과거 응시자에 비해 합격자가 적은 게 문제였다. 다수의 사대부는 과거시험을 통해 관리가 되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대부는 지역사회로 눈을 돌렸다. 공부를 해 쌓은 실력을 바탕으로 지역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주희는 그런 사대부에게 비전을 제시해주었다.
당시 송나라 정부 내에서는 정치와 사회의 관계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는 사회에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 하는 논란이었다. 한쪽에서는 정부가 적극 개입해 사회 변화를 촉진하자고 했다. 그런 주장을 대표하는 사람은 왕안석이었다. 왕안석은 실권을 잡아 자신의 주장을 법제화한 ‘신법’을 실시했다.
다른 쪽에서는 정부의 개입에 반대했다. 그런 주장을 집대성한 사람이 주희였다. 그렇다고 주희가 사회 변화에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주희는 중국 남부 복건성 출신이다. 당시 중국 남부는 경제 발전의 중심지였다. 경제 발전의 결과 사회 변화가 급격히 일어났다.
주희는 사회 변화를 인정하면서 그 변화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폐해를 우려했다. 도덕적 타락, 사회적 약자의 빈곤, 그리고 점점 커져가는 빈부격차였다. 사회 변화와 아울러 도덕성 회복, 평등한 사회의 실현이 필요했다. 왕안석의 신법 정책은 해답이 될 수 없었다. 지나친 정부 주도로 민간의 자율성이 억제되었기 때문이다.
주희는 사대부에 주목했다. 사대부에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폐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주희는 사대부의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강연, 편지 교환, 도서 보급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 사대부를 조직화했다.
이런 바탕에서 주희는 중앙보다는 지역, 관리보다는 민간의 자율성을 강조했다. 중앙보다 지역에 보다 많은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 지역의 관리는 사대부와 함께 일해야 한다. 사대부는 관리의 일을 도우면서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활동을 해야 한다.
이것이 주희의 비전이었다. 비전이 실현되려면 정부의 태도와 아울러 사대부의 자세가 관건이다. 임금과 사대부가 자기 이익만을 앞세운다면 비전은 실현될 수 없다. 그래서 주희는 임금과 사대부에게 끊임없이 자기 수양을 하라고 했다.
주희가 제시한 자기 수양의 방법은 학문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리(理)’와 ‘기(氣)’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방대한 철학 체계를 세워 자기 수양의 지침을 제시하고자 했다. 인간의 본성, 정치와 사회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그것을 깨닫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주희는 이상주의자였다. 비록 왕조체제를 전제로 한 이상이었지만, 오늘날에도 되짚어볼 만한 내용이 많다. 사대부도 그중 하나이다. 과거와 달리 오늘날에는 누구나 사대부가 될 수 있다. 사대부란 지나친 이기심을 억제하고 항상 이상을 향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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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기│<한국 철학 콘서트>, <철학자의 조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