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롤스(1921~2002)는 미국의 철학자다. 미국 볼티모어에서 태어나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공부하고, MIT와 하버드대학교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쳤다. 이런 이력으로 보면 롤스는 평범한 학자의 삶을 살았지만, 그의 철학은 현대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롤스는 오로지 ‘정의’만을 주제로 연구했던 철학자였다. 서른여덟 살 때인 1958년에 논문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발표한 이후 정의와 관련된 주제만을 연구했다. 그 오랜 연구의 결실로 1971년에 대표작 <정의론>을 발표했다. <정의론>에는 오늘날에도 사회정책에 반영되는 철학적 내용이 담겨 있다.
물론 정의가 철학 주제에서 제외된 적은 없었다. 오랜 옛날부터 수많은 철학자들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규명하고자 노력했다.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은 정의 문제를 철학의 한 주요 주제로 다룬 최초의 철학자일 것이다.
플라톤은 자신의 주저인 <국가>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그 문제에서 시작해 이상국가의 상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 <국가>의 주요 내용이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볼 때, 플라톤이 제시한 이상국가는 이상국가라고 할 수 없다. 한 국가를 이루는 세 신분, 즉 통치자 신분, 수호자 신분, 생산자 신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통치자 신분은 지혜, 수호자 신분은 용기, 생산자 신분은 절제라는 덕목을 갖추고 조화롭게 운영되는 국가가 이상국가라는 게 플라톤의 결론이다. 이런 주장은 신분제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현대사회와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플라톤의 주장을 살펴볼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힘이 곧 정의라는 가진 자, 권력 있는 자의 횡포를 비판하고 교육을 통해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한 플라톤의 주장에 주목해보자.
플라톤은 모든 아이를 교육해야 한다고 했다. 교육 과정에 신분 차별은 없다. 신분은 시험을 보아 결정된다. 아이들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동등한 교육을 받는다. 이때 아이들은 수학, 역사, 과학, 체육을 공부한다. 아이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음악이 동원된다. 아이들이 싫증을 잘 내는 과목을 음악 형식으로 만들어 쉽고 재미있게 익히도록 한다.
아이들은 스무 살이 되면 첫 번째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그동안 익힌 교육에 대한 시험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시험은 무수히 많은 청년을 탈락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시험에서 탈락한 청년들은 상인, 점원, 노동자, 농부 등 생산자 신분이 된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자신의 이상을 썼지만, 그 이상이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엄격한 신분제가 유지되던 고대사회에서 신분 차별 없는 동등한 교육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신분 차별이 없어졌다고 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어떨까? 스무 살에 치른 시험으로 신분이 갈라지는 일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앞으로 더 나가보자. 시험에 합격한 청년들은 다시 10년간 교육을 받는다. 이때 받는 교육은 정신과 육체 그리고 성격에 관한 것이다. 한마디로 인격적으로 성숙하기 위한 과정이다. 이런 교육을 받은 청년들은 서른 살이 되면 또다시 시험을 봐야 한다.
이 시험의 목적 역시 청년들을 대량 탈락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때 시험에서 탈락한 청년들은 국가의 행정관이나 군대의 장교 같은 수호자 신분이 된다. 탈락한 사람들이야 마음이 아프겠지만, 지식과 인성을 갖춘 사람들이 국가의 중추가 되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어떠한가?
두 차례 걸친 시험에 합격한 소수의 청년들은 통치자 신분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는다. 교육 기간은 무려 20년이다. 처음 5년간은 철학을 공부하고, 나머지 15년 동안은 이론이 아니라 실재 세계를 익히는 교육을 받는다. 그렇게 해서 지식, 인성, 철학을 갖추고 세상사를 두루 아는 지도자가 탄생한다. 지도자는 정의롭게 나라를 통치함으로써 이상국가를 실현한다. 이렇듯 플라톤의 이상에는 하루아침에 지도자가 되는 사람은 없다. 현대사회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플라톤은 정치 측면에서 정의를 다루었다. 반면 롤스는 사회 측면에서 정의를 다룬다. 롤스가 주장하는 핵심은 ‘공정으로서의 정의’이다. 이 주장은 동어반복처럼 보인다. 공정이라는 말속에 정의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롤스가 공정을 특별히 강조한 이유가 있다.
롤스의 출발점은 공리주의 비판이다. 공리주의란 쾌락과 고통을 비교해 좋고 나쁨을 가리자는 사상이다. 한 개인의 행위가 가져오는 쾌락의 양과 고통의 양을 측정해 쾌락의 양이 많으면 좋은 행위이고, 반대로 고통의 양이 많으면 나쁜 행위라는 것이다.
공리주의자들은 사회에도 그런 생각을 적용한다. 한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개인이 가진 쾌락의 양과 고통의 양을 측정해 쾌락의 양이 많으면 좋은 사회이고 고통의 양이 많으면 불행한 사회이다. 그래서 공리주의자들은 “최대 다수에게 최대 행복을 보장하는 행위는 최선의 것이고, 불행을 가져오는 행위는 최악의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롤스는 공리주의가 ‘좋음’과 ‘옳음’을 구분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분배를 예로 들어보자. 10개의 물건을 한 사람에게 9개, 다른 사람에게 1개를 나눠줬다. 두 사람이 느낄 쾌락의 양과 고통의 양을 비교해본 결과가 쾌락의 양이 많다면 공리주의자들은 좋은 것이라고 할 것이다.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분배가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사회를 바라볼 때는 그런 상식이 사라진다. 롤스의 공리주의 비판을 보자. 공리주의는 “보다 큰 사회적 이익을 위해서는 노예 제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정도의 자유의 침해를 정당화한다”고 비판했다. 우리는 ‘사회적 이익’이라는 명분 아래 부당한 것을 정당화하는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던가.
롤스의 사상은 옳고 그름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롤스는 두 가지 정의의 원칙을 제시했다. 평등의 원칙과 차등의 원칙이다. 평등의 원칙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없다. 선거권과 피선거권, 언론과 집회의 자유, 양심과 사상의 자유, 재산권과 신체의 자유, 부당한 체포 및 구금을 당하지 않을 자유 등 시민의 기본적인 자유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의 원칙으로 ‘차등’을 내세운 게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그러나 차등이 평등을 위한 것임을 알면 롤스 사상의 핵심에 도달한다. 차등은 기회균등에서부터 실현돼야 한다.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누구에게나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기회를 균등하게 하려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해야 한다. 그래서 롤스는 ‘최소 수혜자’, 즉 사회적 약자에게 최대한의 이익을 줘야 한다고 했다.
롤스가 말한 ‘차등’은 실질적 평등을 위한 것이다. 평등을 강조하다 사회적 약자의 처지를 간과하는 것을 경계하고, 사회적 약자에게 이익을 줌으로써 강자와 거리를 좁히자는 것이었다. ‘공정으로서 정의’라 하여 정의의 핵심을 ‘공정’이라고 한 이유이기도 하다.
누구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상황에 접하면 그런 생각은 잊힌다. 사회 이익이든 공정이든 적당한 논리를 내세워 옳은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좋은 것을 주장한다. 롤스의 사상을 살펴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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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기│<한국 철학 콘서트>, <철학자의 조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