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용(1731~83)은 조선 후기의 철학자다. 그가 활동한 영·정조 시대에는 신분제가 해체되면서 사회적 변화가 급격히 진행됐다. 임진왜란으로 큰 타격을 받았던 농업 생산력이 임진왜란 이전으로 회복됐다. 아울러 사농공상이라 하여 가장 천대받고 억압받았던 상업이 발달했다. 정조는 국가의 상업 통제를 해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업과 상업 등 산업이 발전하면서 부를 축적한 시민계층이 생겨났다. 시민계층이 부를 이용해 양반이 되고자 하면서 양반의 수가 급증했다. 정조 때에는 과거시험에 10만 명 이상이 응시하기도 했다. 반면 노비의 수는 급감했다. 일부의 노비는 스스로 획득한 부를 이용해 신분의 자유를 얻었고, 일부의 노비는 도망을 쳐서 신분의 자유를 얻었다. 결국 정조의 뒤를 이은 순조는 공노비를 해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영·정조 시대는 신분에 기초한 중세사회에서 생업에 기초한 근대사회로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던 때였다.
홍대용의 집안은 당시 지배집단인 노론에 속했다. 따라서 홍대용은 높은 벼슬을 할 수 있는 집안 환경을 가졌지만,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했다. 열 살 때 이미 학문에 뜻을 두었다 하고, 열두 살 때 경기 양주(지금의 남양주시)에 있는 석실서원으로 가서 당대의 학자 김원행의 제자가 되었다.
홍대용은 학문의 자유를 추구했다. 그는 당시의 학자들이 주자학만을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것을 비판했다. “우리나라는 조선 중엽부터 편파적인 논의가 나타나고, 시비가 공정하지 못하게 되었다”며,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르고, 그들은 그들대로 선한 일을 하도록 하는 게 나쁘단 말인가”라고 문제 제기를 했다.
홍대용은 스승에게 크게 꾸지람을 들었다. 당시 학자들에게 절대적 권위를 가졌던 송시열의 학설에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스승이 꾸짖자 홍대용은 “큰 의심을 가지지 않는 자는 큰 깨달음이 없습니다. 의심을 가지고서 말을 얼버무리기보다는 자세히 물어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라며 자신을 변호했다. 이렇듯 홍대용은 자유롭게 학문을 하는 선비가 되고자 했다.
홍대용은 다방면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음악과 수학에 조예가 깊었다. 중국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성당에서 오르간 건반을 몇 번 눌러보고는 조선의 음악을 연주할 정도다. 또한 일찍부터 수학을 연구해 <주해수용>이란 수학 연구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특히 홍대용은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천문관측기인 혼천의를 제작하는가 하면, 충청도 천안의 한 부락에 농수각이란 이름의 사설 천문대를 설치했다. 그가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지전설(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설)을 주장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홍대용이 베이징을 방문한 것은 서른다섯 살 때였다. 숙부 홍억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아 3개월가량 베이징을 방문했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해외여행을 할 수 있던 때였다. 홍대용은 직접 중국의 발전된 문물을 보고 서양의 과학기술을 관찰할 기회를 가졌다.
홍대용은 베이징에 다녀온 후 한글로 여행기를 썼다. <을병연행록>이 그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새로운 문물을 접했을 때의 느낌, 새로운 친구를 만난 감상을 솔직하게 썼다. 그중 한 부분을 보자. “북쪽 벽 위 한가운데 한 사람의 화상을 그렸는데, 여자의 상으로 머리를 풀어 좌우로 드리우고 눈을 찡그려 먼 데를 바라보니, 무한한 생각과 근심하는 기상이다. 이것이 곧 예수라 하는 사람이다.”
천주교회를 방문했을 때 처음으로 예수 초상을 본 느낌을 이렇게 기록했다. 예수의 초상을 두고 여성의 초상이라 한 점이 흥미롭다. 조선에서 남성이 머리를 풀어 좌우로 드리우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성이라 본 것이었다. 홍대용은 천주교에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예수의 모습을 배타적으로 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홍대용이 여행기에서 청나라 선비들과 사귄 일을 소개한 내용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청나라를 ‘원수의 나라’, ‘오랑캐의 나라’로 여기고 있었다. 병자호란(1636) 때 청나라의 침략을 받았기에 원수의 나라로 여겼고,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웠기 때문에 ‘오랑캐의 나라’라며 경멸했다. 그래서 청나라 선비들과 사귀고 우정을 나누는 일을 두고 비난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 홍대용은 “군자가 사람을 사귀는 데 차별을 해서야 되겠느냐”고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나라가 오랑캐라는 이름에서 벗어난 지 오래되었다고 하지만, 중국에서 보면 여전히 오랑캐일 뿐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오랑캐가 아니라고 자부할지라도, 다른 나라에서 보면 오랑캐일 뿐이다. 우리가 상대방을 경멸하고 무시하면 상대방 역시 우리를 무시하고 경멸하게 된다. 그래서 무엇이 좋다는 말인가.
홍대용은 <의산문답>에서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했다. “하늘이 생명을 주었고 땅이 길렀으니 피와 살이 있는 사람은 다 똑같은 사람이다. 무리들 가운데 선발되어 한 나라를 맡아 다스리는 자는 다 똑같은 임금이다. 문을 겹겹이 만들고 해자를 깊이 파서 강토를 지키는 것은 다 똑같은 국가이다. 모자를 썼건 갓을 썼건, 몸에 문신을 새기던 현판에 무언가를 새기던 다 똑같은 풍습이다. 하늘에서 보면 어찌 안과 밖의 구분이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모두 동등한 사람이다. 살고 있는 나라가 달라도, 풍습이 달라도 모두 똑같은 사람이다. 오로지 안과 밖의 구분일 뿐이다. 홍대용은 공자의 사례를 들어 보충 설명했다. “공자는 중국 사람이기 때문에 <춘추>에서 중국을 안이라 하고 오랑캐를 밖이라 했다. 공자가 오랑캐의 나라에서 살았다면 오랑캐를 안이라 하고 중국을 밖이라 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높이고 다른 나라를 낮추는 이유는 위치의 차이일 뿐이다. 어찌 사람 사이의 차별이 있겠는가.
홍대용은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정식화했다. “사람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면 사람이 귀하고 사물이 천하지만, 사물의 관점에서 사람을 보면 사물이 귀하고 사람이 천하다. 하늘에서 보면 사람과 사물은 똑같다.” 무엇을 중심에 두느냐에 따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사람을 중심에 두면 사물이 하찮고, 자기를 중심에 두면 상대방이 하찮고, 자기 나라를 중심에 두면 다른 나라를 하찮게 보게 된다. 그러나 자기중심성에서 탈피해 바라보면 모든 것이 동등하다.
이렇듯 홍대용은 세계를 보는 눈, 즉 세계관을 전환하자고 했다. 자신을 절대화하면 상대방을 차별하고 멸시하는 차등적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 자신과 상대방을 동등하게 바라보고 대하는 평등의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 평등은 차별적인 신분이 사라진다고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평등하게 대할 때 참다운 평등이 이루어진다. 이렇듯 신분제가 해체되던 조선 후기, 홍대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사상을 제시했다.
우리 사회에 불현듯 등장한 ‘난민 문제’를 접하며 홍대용이 제시한 사상의 유효성을 확인하게 된다. 유럽에서나 있는 문제라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미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논란을 벌여온 터라, 난민의 수용 여부를 둘러싼 쟁점은 낯설지 않다. 다만 수많은 민족, 인종, 종교와 늘 접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져 민족적·인종적·종교적 이유로 상대방을 비하하면, 반대로 자기 또한 멸시 당하게 되는 시대다. 250년 전 활동했던 조선의 한 철학자의 사상이 여전히 소중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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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기│<한국 철학 콘서트>, <철학자의 조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