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기원전 369년경~기원전 286년경)는 중국 전국시대의 ‘은자’이자 철학자였다. 전국시대는 문자 그대로 전쟁의 시대였다. 7개의 나라가 쟁패를 겨루다 보니 1년 365일 전쟁을 하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이 어수선한 시대에는 자신의 능력을 감추고 조용히 숨어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을 가리켜 은자라고 했다.
<논어>에는 공자가 전국을 유세하며 다니는 동안 만난 은자들의 이야기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은자들은 공자를 “되지 않을 일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라고 조롱했다. 그러나 공자는 은자들을 가리켜 “현세를 피해 숨어 사는 현명한 사람들”이라고 평가했다.
장자는 공자보다 200년 정도 뒷사람이다. 공자의 시대보다 전쟁의 규모가 더 커지고 광폭해진 전국시대에는 더 많은 사람이 은자로 살았다. 장자 또한 은자였다. 장자는 아마도 은자 중에서 오늘날까지 이름이 알려진 거의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장자>라는 책을 남겼기 때문이다.
장자는 현명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소개한 일화를 보면 장자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장자가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초나라 위왕이 사신을 보냈다. 사신은 장자에게 천금을 주고 맞이할 터이니 재상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장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천금은 엄청난 거액이고 재상은 존귀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제사 때 희생되는 소를 보지 못했습니까? 몇 해 동안 잘 먹이다가 수놓은 비단옷을 입혀 태묘에 들여보냅니다. 그때 소는 두려워 자유로운 돼지가 되고 싶다고 하지만 어찌 마음대로 되던가요? 나를 더 이상 모욕하지 말고 돌아가 주십시오. 이 더러운 곳에서 뒹굴더라도 나랏일에는 매이지 않을 것입니다.”
부귀영화를 누리며 나랏일을 하는 것보다 보잘것없는 곳일지라도 그곳에서 자유롭게 사는 게 낫다는 말이다. 세상사에서 벗어나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겠다는 얘기다. 그런 태도를 두고 공자의 제자들은 비판했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 나랏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인륜을 어지럽히는 것이라고. 장자는 공자의 제자들을 비판했다. 나랏일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더 어지러워진다고.
공자의 제자 중 은자를 가장 격렬하게 비판한 사람은 맹자일 것이다. 맹자는 은자들의 주장을 비판하며 “사악한 이론이 사람들을 속여 어짊과 의로움의 도를 막아버린다”고 했다. 그래서 “방탕한 말과 사악한 이론을 펴는 자들을 몰아내어 더 생겨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일생을 두고 해야 할 일이라고도 했다.
맹자는 장자와 동시대 인물이다. 맹자가 기원전 371년경에 태어났으니 장자보다 두 살 위다. 맹자는 오늘날의 중국 산둥성 출신이고, 장자는 허난성 또는 안후이성 출신이라 하니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 살았다. 맹자는 제자들과 함께 여러 나라의 왕들을 만나러 다닐 정도로 유명했고, 장자는 초나라 왕이 초청하려 할 정도로 소문이 났다.
그런데도 <맹자>와 <장자>에는 서로에 대한 언급이 없다. 맹자는 은자를 비판하며 양주를 언급했고, 장자는 공자의 제자들을 비판했지만 맹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아마도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몰랐던 것 같다. <맹자>와 <장자>가 모두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나왔으니, 서로에 대해 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공자의 제자들은 은자를 가리켜 ‘일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장자는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 장자는 인간을 탐구했고, 그래서 누구나 행복하게 사는 길을 찾고자 했다. 그래서인가, 유학자들은 장자를 비판하면서도 장자를 연구했다. 아마도 장자의 유유자적한 삶을 동경했기 때문일 것이다.
장자는 수많은 우화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전달하고자 했다. 우화는 재미있기 때문에 읽기 쉽다. 그러나 우화 속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유명한 ‘장자의 꿈’ 우화를 보자. 어느 날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어 펄펄 날아다녔다. 너무나 유쾌해 자신이 장자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꿈에서 깨어보니 자신은 장자였다. 그래서 장자는 “내가 꿈에서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내가 되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도통 알기 어렵다.
장자는 아마도 인간의 ‘어리석음’을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조차 분별하지 못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얘기다. 그 우화는 아리송하지만, ‘조삼모사(朝三暮四)’를 보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원숭이에게 알밤을 주면서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화를 냈다. 그래서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이 좋아했다. 하루에 주는 알밤은 일곱 개로 동일하다. 그러나 원숭이들은 아침에 세 개를 준다고 하면 화를 냈고, 네 개를 준다고 하면 좋아했다. 원숭이들이 어리석다고 비웃을 것인가. 장자는 원숭이의 모습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라고 한 것이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장자의 충격적인 얘기부터 들어보자. “천하에 털끝보다 더 큰 것은 없다. 그러므로 태산은 작다.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만큼 오래 산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700년을 산 팽조는 단명했다.” 이 얘기를 읽으면 상식 밖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장자는 그 ‘상식’이라는 것을 문제 삼았다.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바꾸어보자. 가장 작은 것을 가장 큰 것이라 하면 털끝은 태산보다 당연히 크다. 가장 짧게 산 것을 가장 오래 산 것이라 하면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가 당연히 팽조보다 오래 산 것이다.
장자가 예로 든 ‘모장과 여희의 우화’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상식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사람들은 모장과 여희를 아름답다고 하지만 물고기가 이들을 보면 물속 깊이 달아나고 새는 이들을 보면 높이 날아가 버리며, 사슴은 이들을 보고 자신의 무리 속으로 도망친다.”
인간은 아름답다고 하지만, 동물은 무서워 도망친다. 인간이 느끼는 아름다움과 동물이 느끼는 아름다움은 다르다. 어디 그뿐인가. 사람들 사이에도 다르다. 시대에 따라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왔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상식은 시대와 조건에 따라 변화한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기존 상식에 얽매일 때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가 된다.
장자는 대붕과 메추리에 대해 말했다. 대붕은 한 번 날면 쉬지 않고 구만 리를 날아간다는 전설적인 새다. 어느 날 대붕이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메추리가 말했다. “저자는 또 어디로 가는가? 나는 몇 길도 날아오르지 못하고 쑥대 사이를 오락가락하지만 이것도 날아다니는 것이다.” 메추리의 어리석음을 비웃지 말자. 그 모습이 인간의 모습일 수 있다.
사회 변화의 시기에는 기존 상식을 허무는 일이 일어난다. 그런 상황에서 기존 상식에 얽매이면 인간은 메추리처럼 자기 틀에 갇힌 어리석은 존재가 된다. 흔히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에는 특정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있다. 사회정책과 관계된 것에는 더더욱 그렇다. 조선시대에 유교적 삶을 상식이라고 했던 것처럼. 그러므로 상식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은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다. 현명한 삶이란 스스로 생각하며 사는 삶이다. 장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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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기│<한국 철학 콘서트>, <철학자의 조언> 저자